다방같은 커피숍에서 스친 어느 아저씨 일행
충무로 뒷골목에 가면 오래된 커피숍이 있다. 다방 같은 분위기여서 주 고객층은 60대 이상이다. 손님들의 겉모습을 보면 대부분 머리가 희끗희끗한 70대 이상으로 보인다. 칸막이가 없어서 옆 자리에서 나누는 대화가 다 들린다. 노인들은 별로 거리낄 것이 없는 듯 큰 소리로 이야기한다.
이곳을 안 지는 몇 년 됐다. 70대의 한명구 영화감독을 충무로의 다른 커피숍에서 우연히 알게 됐는데, 그분이 이곳을 자주 이용한다. 그 분과는 약속을 하는 사이가 아니다. 특별히 약속해서 만날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한 감독을 처음 알게 됐던 커피숍이 갑자기 문을 닫는 바람에 1년 여 동안 서로 만나지 못했다. 그랬는데, 어느 날 이 커피숍에서 우연히 한 감독을 만났다. 그게 벌써 3~4년 세월이 흐른 것 같다.

따라서 이 카페의 여 주인과는 안면이 많다. 어머니에게 가게를 물려받았다고 했다. 정확한지는 알 수 없다. 실내 분위기는 다방인데, 주인은 다방 스타일이 전혀 아니다. 손님들에 대해 먼저 말을 걸지 않는다. 손님이 말을 걸어도 차갑게 응대한다. 평일에는 오후 8시, 토요일에는 오후 3시까지 영업한다. 손님이 없으면 일찍 문을 닫고 퇴근해 버린다. 어정쩡하게 차를 마시러 갔다간, 문이 닫혀서 돌아서야 한다. 나도 몇 번 이런 경험이 있다. 손님에 대한 배려보다 마음 내키는 대로 영업하는 곳이다.
나는 평일에는 시간이 없어서 주로 토요일에 간다. 사무실에 가다가 가끔 들리면, 파리를 날릴 때도 있고 어떤 때는 나이든 단체 손님들로 왁자지껄할 때도 있다. 손님이 없을 때 가면 나는 늘 내가 앉는 자리에 착석한다. 손님이 제법 있을 때도 내가 앉는 자리는 이상하게도 거의 비워 있다. 손님이 별로 없는데, 그 자리에 누군가가 앉아 있다면 십중팔구는 한 감독이다. 한 감독이 딱 내가 앉는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을 여러 번 봤다. 이심전심인지 신기할 정도다. 한 감독과 나는 공간과 자리에 대한 선호도와 취향이 비슷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내 자리 문제가 터진 건 지난 토요일이었다. 사무실에 나가다가 정리할 게 있어서 잠시 들렀다. 안으로 들어서자 사람들이 많았다. 자리가 몇 개 남아 있지 않았다. 여주인은 나를 보자 "저기 가서 앉으라"고 안내를 했다. 바로 내가 늘 앉던 자리였다. 사람이 많은데도 평소처럼 비워져 있어 기분이 좋았다.
이 자리는 주방이 있는 입구에서 가장 먼 구석 쪽에 위치해 있다. 바로 옆에 흡연실이 있다. 내가 이 자리를 애용하는 이유이다. 그런데 한 감독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늘 이 자리를 차지한다. 그것도 내가 앉는 자리, 바로 거기에 앉아 있곤 했다. 주말에는 한 감독이 거의 나오지 않기 때문에 이 자리는 지정석이나 다름없다. 사실 6인석 자리라서, 내가 혼자 쓰기엔 아주 호강이기도 하다.
긴 의자 한쪽에 가방을 놓고, 담배를 피우기 위해 바로 옆 흡연실로 들어갔다. 핸드폰을 보는데, 모자 쓴 사람들이 흡연실 유리 창을 스쳐갔다. 내 자리에 앉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담배불을 끄자마자 흡연실 밖으로 나왔다. 등산을 다녀온 듯한 아저씨 4명이 내 자리에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어, 여기 내 자린데... 내 가방이 어디갔지?"라며 가방을 찾았다. 가방이 보이지 않았다. 아저씨 한명이 "가방은 저기 아주머니가 가져갔다"고 알려주었다.
'담배를 피우러 간 사이 자리를 뺏겼구나!'라고 자포자기하면서, 주방에서 일하고 있는 여주인에게로 갔다. 여주인은 나를 보자 "저기 앉으라"고 했다. 입구 쪽에 있는 자리에 가방이 놓여 있었다. 2인석인데 의자 한 개는 다른 곳으로 들고가 의자 한개가 남아있었다. 사전 양해도 없이 가방을 옮겨놓은 것도 꽤심한데 자리마저 맘에 들지 않았다. 있으려면 있고 가려면 가라는 눈치였다. 평소 주인 태도가 그러니 이런 상황이 당황스럽지 않았다.
나는 거기에 앉지않고 가방을 들었다. 입구 주방에 앉아있는 여주인에게 "그냥 가야겠다"며 인사를 했다. 주인은 좀 당황한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시 긴장된 분위기가 흘렀다. 밖으로 나가려는데, 그 때 아저씨 몇분이 "다음에 오겠다"며 급히 나를 지나쳐 먼저 나갔다.
뒤돌아 보니 내 자리에 아저씨 일행이 없었다. 바로 조금 전 밖으로 나간 사람들이 그들이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내가 가방을 메고 나가려고하자 자리를 차지한 미안함 때문에 비켜 준 것이 아닐까 싶었다. 한편으로 주인이 손님의 가방을 막무가내로 옮긴 것에 대해 불편한 마음이 작용했을 지도 모른다.
나는 발길을 돌려 원래 자리에 앉았다. 주인이 차를 갖다놓고 갔다. 나는 핸드폰으로 지인들에게 문자를 보내느라 주인을 보지 않았다. 들어올 때 주문했던 차였다. 차를 마시며 자리를 비워준 아저씨 일행을 생각했다. 그들 중 한명 이상은 분명히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만일 내가 친구들과 같이 카페에 갔다가 누군가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다면, 과연 나는 그 사람을 위해 자리를 비워 줄 수 있을까? 아니면 한 사람이 여러명 앉을 수 있는 자리를 양보하는 게 마땅하다고 여기며 그 자리를 고수할까? 그리고 주인이 안면이 있다지만, 사전에 말 한마디 없이 가방을 맘 대로 옮겨놓는다면 이 가게에 발길을 끊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