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관이다', '가관스럽다'의 '가관(可觀)'에 얽힌 역사적 유래와 뜻
일상생활 중에 가끔 '가관이다', '가관스럽다'는 말을 듣거나 사용할 때가 있다. 누군가의 행동이나 행색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정상일 때 놀림조로 사용하는 말이다.
다음(daum) 어학사전을 보면, '가관'은 2가지 뜻을 갖고 있다. 첫째는, '‘-이다’와 함께 쓰여, 꼴이 볼만하다는 뜻으로, 격에 맞지 않거나 아니꼬운 언행이나 상태를 놀림조로 이르는 말'이고, 둘째는 '경치나 어떤 모습 따위가 좋아서 꽤 볼 만함'의 뜻이다.
네이버(naver) 어학사전에도 2가지 해석이 나와있다. 첫째는 '경치 따위가 꽤 볼만함'이라는 의미이고, 둘째는 '꼴이 볼만하다는 뜻으로, 남의 언행이나 어떤 상태를 비웃는 뜻으로 이르는 말'이라는 것이다.
다음과 네이버의 어학사전은 '가관'의 뜻에 대해 '사람'과 '경치'의 순서만 바뀌었지, 2가지 뜻은 대동소이하다.
그런데 '가관이다', '가관스럽다'는 말의 유래가 고려시대 윤가관이라는 인물에서 나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고려 31대 왕 공민왕(1330~1374)은 원나라 공주 출신의 왕비였던 노국대장공주가 1365년 난산으로 사망하자, 술로 슬픔을 달래며 후사를 걱정했다. 공민왕에게는 요승으로 알려진 신돈(?~1371)의 여종 반야가 낳은 모니노(뒤에 우왕)가 있었다. 하지만 신돈의 자식이라는 소문과 천한 여종 출신이라 세자로 삼을 수 없었다.
홍건적의 난과 김용 등 내부 반란 등으로 위협을 느낀 공민왕은 1372년 왕권 강화와 자신의 신변 보호를 위해 자제 위(子弟衛)를 설치했다.

경북 영주시에서 학예사로 활동하는 박석홍 전 소수박물관장에 따르면, 공민왕은 어느 날 만취한 상태에서 자제위의 심복들을 불러 밀명을 내렸다.
"내가 나이가 들어 후사를 얻을 수 없다. 내 비빈들 가운데 셋째 익비가 골반이 튼튼하고 아이를 잘 낳을 것 같으니 너희들이 잠자리를 같이 하거라."
이에 경북 구미 출신의 윤가관(尹可觀)은 "천부당 만부당한 일입니다"라며 목숨을 걸고 익비와의 잠자리를 거부했다. 반면 왕의 강요에 겁먹은 개경(현재 개성) 출신의 홍륜은 "전하의 명을 따르겠나이다"라고 순종했다. 공민왕의 청을 거절한 윤가관은 온몸이 만신창이가 될 정도로 매를 맞고 자제위에서 쫓겨났다. 왕궁에서 왕의 호위대로 부러움을 샀던 윤가관은 하루아침에 뼈가 부러지고 온몸이 망가진 채 낙향했다. 뒤에 몸을 추스른 그는 왜구를 막다가 전사했다.
윤가관의 이런 모습을 지켜본 고향 사람들은 "저 놈이 머리 좋고 인물 좋아 왕궁에 갔다가 병신돼 왔네. 살다 살다 가관스러운 꼴을 다 보네"라고 입을 모았다.
이처럼 '가관(可觀)'이라는 말은 고려말 자제위 출신의 '윤가관(尹可觀)'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박석홍 전 관장의 설명이다.
한편 홍륜은 익비와 잠자리를 가져 공민왕에게 후사를 안겨주었다. 그러자 공민왕은 홍륜의 아이를 자신의 아이로 둔갑시키기 위해 최만생을 시켜 홍륜을 제거하려고 했다. 최만생은 오히려 홍륜에게 공민왕의 제거 계획을 일러바쳤다. 공민왕은 술에 취해 있다가 홍륜과 그 일당들에게 살해당했다. 1374년이었다. 공민왕이 죽자, 아이러니하게도 모니노가 왕위를 승계했다. 그가 고려 32대 왕 우왕(1365~1388)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