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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백선엽 장군 분향소 참배한 장기표, "역사를 편협하게 보면 안돼"

polplaza 2021. 4. 27.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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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 선생은 2020년 8월 어느 날 나에게 물었다. 

"자네, 백선엽 장군 분양소 참배했어?"
"안 했습니다!"
"그럼, 나랑 광화문에 같이 갈래?"
"네?"
"광화문에 (백선엽 장군) 분향소 있잖아?"
"아, 같이 가겠습니다."

백 장군이 돌아가신 지 한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백 장군은 2020년 7월 10일 별세했다. 재향군인회를 중심으로 전국에서 '구국영웅 고 백선엽 장군 추도 분양소'가 설치됐다. 서울 광화문에도 '백선엽 장군 49일 추모 시민분향소'가 마련됐다. 

장기표 선생이 가고자 했던 곳은 바로 광화문에 마련된 시민분향소였다. 그동안 다른 일로 신경을 못쓰시다가 갑자기 생각이 난 모양이었다.

백선엽 장군은 1950년 6.25 전쟁 때 낙동강 방어선의 최후 보루였던 다부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한반도의 적화를 막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것으로 평가받는다. 북한 인민군의 공세를 낙동강 전선에서 막아냄으로써,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원수가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를 '호국영웅', '구국영웅'으로 부르는 이유이다.

그러나, 진보 진영의 일각에서는 그의 젊은 시절 만주군관학교 입교와 간도특설대 근무 전력 등을 문제 삼아 친일인사로 낙인찍어 국립묘지 안장을 반대하는 여론을 조성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진보 진영을 의식해서인지 조화만 보내고 조문을 하지 않았다. 헌법상 국군통수권자인 문 대통령이 조문을 하지 않은데 대해 안타까움을 표시하는 국민들이 많았다.
특히 김형오 전 국회의장이 개인 블로그에 쓴 '<대통령께 간곡히 호소합니다> 국군 통수권자로서 백선엽 장군을 조문해 주십시오'라는 글은 도하 언론에 보도됐다. 언론이 이 글을 다룬 것은 여론을 반영했기 때문이다(김형오 전 의장 글 보기).

장 선생은 "백 장군이 1920년 태어났을 때는 일제 강점시기였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없는 시기였다. 10대 후반, 20대 초반에 무엇을 알겠나. 지금 친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만일 그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그런 선택을 안 했다고 장담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장 선생은 "사람은 누구나 공과가 있기 마련이다. 당시의 상황을 보면서 평가해야 한다. 일제 때 그러한 잘못이 있긴 하지만, 어찌 됐든 6.25 전쟁 때 나라를 구한 분이 아니냐? 나라에 기여한 공과를 따지면 공이 훨씬 많은 분이다"라고 했다. 덧붙여 "역사를 한쪽으로만 편협되게 보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장 선생은 광화문에 설치된 시민분향소에서 고(故) 백선엽 장군의 영전에 삼가 묵념을 올렸다. 공산주의 체제인 북한 인민군의 침략을 막아 자유민주주의와 대한민국을 구해낸 분, 고 백선엽 장군에게 경의를 표하고 고인의 명복을 빈 것이다.

 

(고 백선엽 장군 추모 분향소에서 묵념하는 장기표 선생)

 

(분향소 옆에 붙은 고 백선엽 장군과 6.25 전쟁 사진들)

 

(분향소 옆에 붙은 고 백선엽 장군과 6.25 전쟁 사진들)



(분향소 옆에 붙은 고 백선엽 장군과 6.25 전쟁 사진들)

 

(분향소 옆에 붙은 고 백선엽 장군과 6.25 전쟁 사진들)

 

(분향소 옆에 붙은 고 백선엽 장군과 6.25 전쟁 사진들)

 

(고 백선엽 장군 추모 시민 분향소가 마련된 광화문 광장)

 

(고 백선엽 장군 추모 시민 분향소)

 

(시민분향소에서 향불을 올리는 장기표 선생.  2020.8.14)

 

 



<백선엽(白善燁) 장군 약력>

1920년 11월 23일 평안남도 강서에서 출생, 2020년 7월 10일 작고, 향년 100세.
대한민국 최초의 대장. 주프랑스, 주캐나다 등 각국 대사 역임, 교통부장관 역임. 본관은 수원(水源), 호는 우촌(愚村)·운산(雲山)이다.

1941년 12월 30일 만주국 봉천군관학교를 졸업(9기)하고 견습군관을 거쳐 만주군 소위로 임관됐다. 1943년 2월 간도특설대로 전근되어 해방 때까지 약 2년 6개월 이 부대에서 근무했다. 간도특설대는 중공군 팔로군을 소탕하기 위해 창설된 부대로서, 부대장은 일본인 장교였으나 중대장의 반수와 소대장 이하 전 사병은 조선인 출신이었다. 팔로군에는 조선인들도 섞여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동포끼리 총부리를 겨눈 셈이 됐다. 백 장군도 회고록에서 "간도특설대는 일본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의 일환"이라고 썼다. 광복 당시 직책은 만주국 헌병 중위였다고 한다. 일제시대 만주군관학교와 간도특설대 근무 전력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다. 

해방 후 고당 조만식의 비서로 잠시 일하던 중 월남하여 1945년 12월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학했다. 국방부(당시 통위부) 정보국장(대령)으로 근무할 당시 남로당 군사책 혐의로 붙잡혀 사형 위기에 놓였던 박정희 전 대통령을 구제한 일화는 유명하다. 6.25 전쟁 때는 1사단장으로서 낙동강 다부동 전투에서 미군과 연합하여 북한군의 공격을 막아내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일각에서는 백 장군이 스스로 전공을 과대평가했다는 주장도 있다. 낙동강 방어선 전체는 약 240km에 이르렀는데, 한국군 5개사단과 미군 3개 사단 등 8개 사단이 모두 싸운 덕분이라는 것이다.

그는 전쟁 중 승승장구하여 1953년 1월 한국군 최초로 33세의 젊은 나이에 대장 계급을 달았고, 휴전회담에 한국 측 대표로 참가했다. 주한미군은 백 장군의 6.25 전공을 높이 평가하여 주한미군 사령관이 부임할 때마다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주한미군은 2013년 그를 미 8군 명예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2020년 7월 10일 노환으로 타계했다. 국립묘지 안장을 놓고 국내에서는 친일 논란과 6.25 전쟁 영웅이라는 극단의 시각이 맞서 갈등을 빚었다. 서울 동작동 국립 현충원에는 장군 묘의 여분이 없어 결국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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