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이야기/행군의 아침 도서

어머니의 믿기지 않는 행군의 아침 열독

polplaza 2021. 2. 8. 00:08
반응형

어머니는 평생 농촌에서 흙을 일구고 사시는 분이다.

올해 연세가 예순여섯.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하신 분이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퇴하셨다.

 

그런 어머니가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종이 비료부대를 잘라서 'ㄱ, ㄴ, ㄷ…, 아, 야, 어, 여…'를 가르쳤다.

당신이 못 배운 한을 내게서 보상받으려 하신 것이 아닐까.

나는 그런 것도 모르고 그냥 어머니가 가르치는 대로 배웠다.

때로는 어머니가 내준 과제를 다 못해서 회초리로 매를 맞기도 했다.

그것이 사랑의 매라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오늘의 내가 있게 된 것은 어머니의 힘이 컸다.

 

결혼할 적엔 농촌 총각인 신랑의 얼굴도 한번 못 보고 하셨다.

할머니가 외가에 한번 다녀가시고는 결혼이 정해졌다는 것이다.

당시엔 부모들만 좋다고 하면 결혼이 이뤄졌다.

신부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시집와서 삼촌 세 분과 고모 두 분의 뒷바라지를 하셨다. 

특히 나보다 4살 많은 막내 고모는 머머니가 많이 돌보셨다.

그래서 막내 고모는 지금도 어머니를 각별히 생각하고 사신다. 

 

장남인 내가 입영하던 날,

어머니는 만사를 제쳐놓고 나를 따라왔다.

아들이 군대가는데, 농사 하루 이틀 못 짓는 게 뭔 대수겠느냐는 생각이셨다.

입영열차에 오르는 순간, 어머니의 눈시울이 붉어지며 물기가 고이는 것이 보였다.

나도 갑자기 눈물이 나오려 했다.

아들을 군대에 보내는 어머니의 마음이 아프다는 사실을 읽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어머니를 마주보면 사나이의 눈물을 보일 것 같아 돌아섰다.

입영열차에 올라 한 모퉁이에서 어머니를 살펴보며, 애써 눈물을 참았다.

그때가 23년 전의 일이다.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던 군생활,

복무 기간 내내 그런 생각을 했다.

전역 후에도 오랫동안 그런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또 사회생활을 하느라 군대 생활을 잊고 살았다.

 

그런데 전역한 지 20년이 지난 후,

그때의 기억들이 아련한 추억으로 떠올랐다.

당시엔 젊은 시절을 그렇게 보낸다는 것이 아깝기도 했지만,

이제 와서는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래서 복무 당시에 썼던 수양록을 들춰내 기억을 하나 둘 더듬었다.

수양록에 간간이 그렸던 삽화와 시를 읽으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한 권의 책으로 묶어보자.

이렇게 해서 행군의 아침이란 책이 나오게 된 것이다.

 

책을 만들기 위해 다시 쓴 원고지가 무려 2,000매 분량이 넘었다.

책 두 권을 만들 수 있는 양이었다.

지겨운 군대 이야기를 2권씩이나 만드는 것도 이상하지만,

출판비용도 만만치 않아 1권으로 압축해서 내기로 했다.

원고지 500매 이상을 줄이고, 글자 크기도 줄이고, 간격도 줄였다.

그렇게 했는데도 책의 분량이 332쪽이나 됐다.

 

지난번 시골에 갔을 때,

이 책을 시골에 놓고 왔다.

내가 시골에 있는 동안 칠순의 아버지께서 

돋보기를 꺼내 책을 읽으시는 모습을 보았다.

아들이 어떻게 군생활을 했는지 무척 궁금하셨던 모양이었다.

아마도 다른 책이었다면 그렇게 애써서 보시진 않았을 것이다.

 

얼마 전 난 어머니와 전화 통화를 하면서 깜짝 놀랐다.

어머니께서도 행군의 아침을 다 읽으셨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소설책도 아니고 생활 정보가 담긴 책도 아닌데,

남들이 재미없다는 군대 얘기를 

며칠 밤을 새워가며 다 읽으셨다고 하셨다.

그야말로 주경야독하신 것이다.

 

나는 정말 믿기지 않았다.

평생을 책과 담을 쌓고 지냈을 어머니께서

어떻게 그 책을 다 읽으셨을까.

 

"정말 다 읽으셨습니까?"

"그래, 다 읽었지. 밤새 읽느라고 머리가 다 아프더라."

 

그랬다.

그 연세에 머리가 아플 정도로 열심히 읽으셨던 것이다.

아들이 어떻게 군생활을 했을까.

어머니는 한 번도 내가 들려주지 않았던 나의 군대 생활을 

그 책을 통해 알고 싶으셨던 것이다.

 

"그래. 몸은 괜찮으냐?" 어머니의 걱정스러운 물음이었다.

"그때가 언젠데요. 지금은 아무 이상 없습니다." 나는 뜻밖의 질문에 웃으며 대답했다.

어머니는 책 속에서 일병 때 구타당한 일을 잊지 못하셨던 것이다.

20여 년 전에 있었던 구타 사건, 어머니는 그것도 걱정이 되신 모양이었다.

 

어머니는 또 내게 한 번도 말하지 않았던 사실을 실토하셨다.

나를 입영 열차에 실어보내고 눈물을 많이 흘렸다고….

참고 참으려고 무척 애를 썼는 데도 자꾸 눈물이 나오더라고 했다.

나의 어머니도 여느 어머니와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나는 궁금한 게 있었다.

책을 다 읽으신 어머니의 마음을….

"어머니, 책 읽으신 소감은 어땠습니까."

어머니는 주저없이 이렇게 대답하셨다.

"우리 아들 장하다."

다소 떨리는 목소리였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어머니한테 처음으로 듣는 말이었다.

난 어머니의 말씀에 가슴이 찡해 왔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믿을 수가 없다.

노령의 어머니께서 그 많은 내용을 어떻게 다 읽으셨을까.

농사일에 파묻혀 몸도 안 좋으신 데 말이다. 

 

어머니, 정말 놀랐습니다.

어머니가 행군의 아침 애독자였다는 사실을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출처: 행군의 아침 블로그. 2006.3.11.)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