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재래시장에서는 깎아주는 것이 인심이고 즐거운 일

polplaza 2023. 10. 22. 23:00
반응형

짬을 내서 을지로 4가에 갔다. 벽지를 알아보러 간 것이다. 주방 쪽의 벽지가 윗집에서 샌 물 때문에 곰팡이가 생겨 교체하기 위해서였다. 주방에 바른 벽지와 똑 같은 벽지를 구하기 위해 이사할 때 벽지를 샀던 가게를 찾아갔다. 벽지 쪼가리 하나를 챙겨서 호주머니에 넣고 갔다. 그런데 문이 닫혀 있었다. 다른 옆 가게들도 닫혀 있었다. 일요일이라 모든 벽지 가게가 쉬는 모양이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말이 딱 떠올랐다.

아쉬움을 안고, 바로 옆에 있는 시장통으로 들어갔다. 재래시장이다. 일요일인데도 대부분 가게 문을 열어놓고 있었다. 이곳은 멸치, 쥐포, 명란젓, 황태, 굴비, 인삼, 과일, 밤, 채소 등 농수산물의 집합소다. 시장 안의 중간 쯤을 지날 무렵, 가끔 가는 가게의 주인 아주머니가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했다. 이 가게에서 손님 2명이 땅콩과 쥐포 등 포장된 식품 여러 봉지를 사는 듯 했다. 두 사람은 아저씨와 아주머니였다. 아주머니가 구매한 봉지를 가방에 넣는 동안, 아저씨가 1만원을 깎아 달라고 요청했다. 주인 아주머니는 1만원을 깎아주면 남는 게 없다고 했다. 그러자 아저씨는 현금으로 할테니 1만원을 깎아달라고 다시 요구했다. 같이 온 아주머니는 흥정에는 관심없는 등 식품 봉지를 가방에 넣는데 몰두했다. 봉지가 많아서 가방에 다 들어가지 않았다. 주인 아주머니가 봉지를 가방에 넣는 것을 도와주었다. 두세 봉지는 결국 가방에 들어갈 틈이 없었다.

아저씨는 주인 아주머니에게 "10만원어치 넘게 샀는데 정말 남는 게 없냐"고 물러서지 않았다. 주인 아주머니는 할 수 없다는 듯이 "5천원을 깎아주겠다"고 했다. 그러자 아저씨도 "그러면 그렇게 하자"면서 "5천원밖에 안깎아주니 카드로 계산하겠다"고 카드를 내밀었다. 주인 아주머니는 카드를 받아들고 "카드로 계산하면 정말 남는 게 없다"면서도 카드기에 가서 결제를 했다.

두 사람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나는 주인 아주머니가 "5천원 깎아주겠다"고 할 때 한마디 했다.

"저는 여기 자주 이용하는 데 한번도 깎아준 적이 없었다. 오늘 어저씨를 보니 저도 좀 깎고 가야겠다"고 웃으면서 아저씨와 주인 아주머니를 바라봤다.

이 말에 5천원 깎은 것에 다소 불만스럽게 보였던 아저씨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같이 왔던 아주머니도 활짝 웃었다. 주인 아주머니는 나에게 미안한 표정으로 "오늘 깎아 드리겠다"고 웃으며 말했다. 가방을 짊어진 아주머니와 여분의 봉지를 든 아저씨는 함께 웃으면서 내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말린 바나나)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떠난 뒤, 나는 '말린 바나나' 한봉지를 주문했다. 주인 아주머니는 천원을 깎아주겠다고 했다. 5천원짜리인데 4천원만 받겠다고 했다. 나는 "안 깎아줘도 된다"면서 웃으며 5천원을 내밀었다. 주인 아주머니는 나의 진심을 알았는지 사양하지 않고 5천원을 다 받았다. 내가 바나나 봉지를 들고 가게 밖으로 나서는데 불렀다. 주인 아주머니는 "이거 하나 가져 가라"고 하면서 문어 다리 같은 것을 들고왔다. "이게 뭐냐"고 했더니 "대왕오징어의 말린 다리"라고 했다. 약 50~60cm쯤 됐다. "이빨이 약해서 씹어 먹기 곤란하다"고 살짝 사양했더니 "잘라 주겠다"고 했다.

뜻밖에 주인 아주머니가 대왕오징어 다리 1개를 잘게 잘라서 봉지에 넣어 줘서 요새 말로 '득템'을 했다. 질길 것으로 생각했는데 의외로 씹는 맛이 있고, 먹기도 쉬웠다. 간식이나 술 안주용으로도 적격일 것 같다.

재래시장에서는 조금이라도 깎아주는 것이 인심이고 즐거운 일이다. 정형화된 팍팍한 세상에서 재래시장은 우리의 마음을 여는 숨통이고 빛이다. 마음이 울적하거나 답답할 때는 재래시장에 가보자.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