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함박눈 내린 날 '털장갑' 추억, 엘리베이터 안에서 생긴 일

polplaza 2023. 12. 20.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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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에 함박눈이 펑펑 내렸다. 예상치 못한 눈이었다. 지하철 역사 옆에 선 가로등 불빛에 눈이 훨훨 날갯짓을 재촉하며 흩어졌다. 코트를 입은 젊은 여성이 가로등 아래로 흩날리는 눈을 바라보며,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곧이어 누군가와 화상 통화를 하며 눈 내리는 장면을 보내 주는 듯했다.

지하철 출구를 벗어나자 찬바람과 눈이 얼굴을 세게 때렸다. 양 손을 코트 호주머니에 넣고 빠른 걸음으로 집을 향했다. 일을 늦게 마치는 바람에 늦은 시각이었다. 눈이 인도에 제법 쌓여 있었으나 사람 발자국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근처 24시 편의점 앞에는 몇몇 젊은이들이 큰 소리로 떠들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간간히 택시와 승용차가 도로 위로 지나갔다. 주택가 가게들이 길 앞에 세워둔 배너가 바람에 흔들거렸다. 이동하면서 핸드폰을 꺼내 눈 오는 거리 풍경을 동영상으로 찍었다. 내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에 올리기 위해서였다. 눈 오는 장면을 편집하여 배경음악을 깔면 괜찮은 영상이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눈이 얼마나 내렸는지 아파트 단지에 주차된 차량들은 모두 흰색으로 변해 있었다. 원래 색깔이 흰색이든 검은색이든 모두 하얗게 눈으로 덮여 있었다. 눈 더미 속에서 번호판만 겨우 머리를 내밀고 있는 듯했다.

아파트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우선 외투에 잔뜩 쌓인 눈을 털었다. 외투를 입은 채로 양쪽 팔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리고 뜀 뛰기를 몇 번했다. 어깨에 메고 왔던 가방에도 눈이 가득 쌓여 옆으로 약간 기울여서 좌우로, 아래위로 흔들었다. 이때 한 여성이 현관 입구에 도착해 역시 검은색 패딩(외투)에 쌓인 눈을 털기 시작했다. 나는 외투와 가방에서 눈을 최대한 털어낸 후, 엘리베이터를 탔다. 마침, 그 여성도 엘리베이터를 탔다. 이곳에서 몇 년째 살지만 처음 보는 분이었다.

(가로등 불빛에 반사된 함박눈)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이웃을 만나지만, 서로 인사하는 일은 드물다. 혹여 인사를 했더라도 의례적이어서, 더 이상 친분을 갖는 일은 거의 없다. 한 순간 엘리베이터에 같이 탔을 뿐, 곧 각자 가려고 하는 층에서 내리면 그만이다. 이 여성도 예외일 수는 없다.

엘리베이터에 먼저 탄 여성이 18층 버튼을 눌렀다. 나는 17층을 눌렀다. 버튼을 누른 층수로 보면, 여성은 우리 집 바로 위층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처음 보는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각자 내릴 층의 버튼을 누르고 기다렸다. 밤늦은 시각이라 잘못하면 괜히 오해를 살 수 있다. 나는 여성을 보지 않고 엘리베이터 입구 쪽에 섰다. 17층에 도착하면 곧 바로 내릴 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여성이 말을 걸어왔다. "이거 쓰세요!"

여성이 처음 보는 남자에게 말을 걸기란 매우 힘든 일이다. 그것도 밤 늦은 시각에, 단 둘이 있는 엘리베이터 안이라면 더욱 그를 것이다. 너무 예상밖이어서 설마 나에게 말을 걸었을까 싶었다.

나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여성이 또 "이거 쓰세요!"라고 했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그녀와 나, 두 사람밖에 없었으므로 귀신과 대화하지 않는 이상 틀림없이 나에게 한 말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안쪽에 서 있는 여성을 바라봤다. 그녀는 목이 긴 털장갑을 쥐고 있는 왼손을 내밀고 있었다. 오른손은 털장갑을 낀 상태였다.

여성은 왜 털장갑을 내게 주려는 것일까? 그 뜻을 전혀 알아 채지 못했다. 나는 당연히 "괜찮다"며 주춤했다. 여성은 한 번 더 "이거 쓰세요!"라며 장갑을 내밀었다. 나는 의아하다는 듯이 "왜 그러시죠?"라고 물었다. 그녀는 "머리 위에 눈 터세요"라며 눈웃음을 지었다. 순간, 엘리베이터 한쪽에 설치된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봤다. 어이쿠~. 머리카락 위에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여성은 내 머리 위에 쌓인 눈을 보고, 눈을 털도록 자신의 장갑을 건네려고 했던 것이다.

여성은 다시 "이걸로 눈 터세요"라며 장갑을 내밀었다. 할 수 없이 "정말 써도 되겠어요?"라고 확인차 물었다. 여성은 "괜찮아요"라며 빙긋 웃었다. 결국 여성의 강권(?)에 못 이겨 털장갑을 받았다. 장갑의 손목 부분을 잡고 머리를 숙여 눈을 털었다. 여성의 성의를 봐서 서너 번 머리 위를 툭툭 친 후, 여성에게 "감사하다"며 장갑을 돌려줬다. 여성은 "뒷목 쪽에도 눈이 있어요"라며 "이걸로 터세요"라고 또 장갑을 내밀었다. 나는 "아~, 괜찮습니다"라고 사양했다. 그러는 사이, 17층에 도달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내가 먼저 내려야 했다.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오면서, 뜻밖의 호의를 베푼 여성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여성은 흰색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눈으로 인사를 받아주었다.

다음에 또 우연히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든, 또 집 근처에서 만나든 알아볼 수 있다면 인사라도 하고 지내면 좋을 것이다. 사실 어쩌다 한번 스쳐가듯 만난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잊히고 얼굴조차 기억하기 힘들다. 마스크를 쓰고 있는 사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엘리베이터에서 여성이 보여준 배려와, 그로 인한 인연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끝나고 말 것이다.

"혹시 몇 호 사세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나는 엉겁결에 뒤돌아보며 여성에게 물었다. 여성은 잠시 멈칫하다가 "1855호요"라고 대답했다. 이어서 "거기는 몇 호세요?"라고 물었다. 나에게 물은 것이다. 나는 "1727호요"라고 대답했다. 나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엘리베이터 문이 "스르르~" 소리를 내며 닫혔다.

나 홀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세상에 저런 여성이 있다니... 참,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경계심을 갖는 것이 오늘날 세태라고 인식하고 있었는데, 여성은 나의 그런 고정관념을 여지없이 깨버렸다. 얼굴도 알 수 없고, 나이도 알 수 없고, 직장도 알 수 없지만, 미지의 여성은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었다.

이웃 아저씨의 머리에 쌓인 눈을 보고 그걸 털 수 있게 자신의 장갑을 벗어주는 배려 정신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 애틋한 마음이 생기더라도, 더욱이 여성이 처음 보는 남성에게 용기를 내서 실천하는 것은 더욱 쉽지 않은 일이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 출신이거나 종교단체에서 자원봉사 등으로 베풂을 실천하는 분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직업에 관계없이 훌륭한 성품을 가진 분들도 많이 있으므로, 교사이거나 종교인이 아닐 수도 있다.

함박눈이 내리던 어느 날 밤, 털장갑을 건네준 여성에게 감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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