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고 장기표 선생의 사회장 영결식이 2024년 9월 25일 오후 7시 민주화운동기업사업회 주관으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행사장에서 열렸다. 민주화운동의 후배이자, 전태일기념사업회 운영과장과 전태일재단 초대 운영위원을 지낸 이종률 씨가 추모시를 낭송해 참석자들을 숙연케 했다. 이 시는 장기표 선생이 운명하기 10일 전 그의 쾌유를 빌며 생전에 썼으나, 영결식 때 추모시가 됐다.
전문은 아래와 같다.
선생님, 화두는 여여하십니까. 천하의 장기표 선생이 몸져눕다니요?
해방둥이로 이 세상에 나서 60년대 중반 학생운동에 투신하신 후 자신을 버리고 평화시장의 동심 곁으로 돌아간 전태일의 대학생 친구가 되어 청계피복 사람들을 피붙이처럼 보살피시고 우리나라 노학연대의 시작점 조영래와 함께 전태일 평전을 눈물로 쓴 장기표 선생이 몸져 눕다니요?
1986년에 쓴 항소이유서 해방의 논리와 자주사상에서 영남의 지역감정은 그냥 지역감정이지만 호남의 지역감정은 계급감정이라고 직설하셨고, 국가보안법은 지키지 않아도 교통법규는 지켜야한다고 하셨죠.
우리 민주화운동의 병폐는 우리 내부의 3대 컴플렉스, 학생운동 컴플렉스, 노동운동 컴플렉스, 북한 컴플렉스에서 비롯되었음을 갈파하시던 천하의 장기표 선생이 몸져눕다니요? 민통련 정책실장 시절 중앙집행위원회 회의나 지역조직 연수회 때 정세를 분석하고 투쟁 방향을 이야기하면 그대로 책 한 권이 되었고 집회 현장에서 사자후를 토하기 시작하면 그 명쾌한 논리로 얼어붙은 사람들 마음을 활활 타오르게 만들던 사람 그 바쁜 와중에도 빨래와 집안 일을 도우려 얼른 집에 다녀오고 수배 중에 숨겨준 교도간의 친척 그 집 식구들을 위해 마루를 반들반들하게 닦아놓고 따뜻한 물을 데워놓던 그 장기표가 몸져 눕다니요?
전민련 사무처장 때 이 나라의 후진 정치를 개혁하고자 문명사적 대전환을 누구보다 먼저 직시하고 새로운 이념과 정책으로 모든 사람들의 자유와 행복, 복지 속에 자아실현의 보람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민중당을 창당하고 30년을 넘게 분투하셨던 한국 민주화운동의 상징 한국의 정치문화재 자아실현과 무아실현의 사이에서 들었던 그 화두, 여전히 성성하십니까?
30년 민주화운동의 결론 사랑의 정치를 전면에 내세웠던 첫 총선에서 패배했을 때 장기표를 몰라주는 민중을 원망하며 삭발을 했던 나를 바라보던 선생의 애닯은 눈빛
중부지역당 사건 때 면회 가면 교도소 벽에 걸린 노을진 마을의 냇물을 그린 목가적 풍경 그림이 피카소 그림보다 훨씬 좋다던 선생의 순수
신학철 화백이 활동자금에 보태라고 보낸 백범 김구 그림을 족히 천만 원이 넘을 작품을 누가 마음에 들어 달란다고 달랑 30 만 원에 주어버린 선생이 순진
그 순수와 순진으로 벼려낸 민주시장주의 정치운동의 그 화두 여전히 성성하십니까?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 민청학련사건 청계피복노조사건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5.3인천사태 중부지역당사건으로 다섯 번 징역을 9년 넘게 살고 그보다 많은 세월을 수배자로 살았던 이 나라 최장기 수배자
민주화운동을 훈장처럼 달고 으스대는 사람들이야 어찌하든 끝내 민주화운동 보상신청을 하지 않았던 마지막 재야
주범이 보상 신청을 하지 않으니 우리 종범들도 꼼짝할 수 없는 이 나라 좌우파의 비난과 질시 가운데 고된 삶을 살아내며 다듬은 녹색사민주의 복지국가의 그 화두 여전히 성성하십니까?
살 만큼 살았고 할 만큼 했으며 이룰 만큼 이루었으니 우주의 순환질서 자연의 이법에 따른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겠다 세상일이란 때가 되면 거기에 맞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난다. 그렇습니다. 선생님은 이룰 만큼 다 이루셨습니다.
효창운동장 서울대 가을 운동회 때 남들보다 한 바퀴를 뒤쳐져서도 저 푸른 하늘 아래서 마음껏 달려보셨고 리영희 선생과 법대 동료 조영래가 밤새도록 말렸어도 기어코 현장을 가야겠다며 월남전에 참전하셨고
이소선 어머니와 계훈제 선생과 이 땅 민중들을 끔찍이도 섬기셨고 사랑의 정치를 위한 나의 구상을 비롯한 마흔권이 넘는 책을 내며 우리 시대의 이념과 정책을 제시해 주셨기에 이룰 만큼 이루었으며, 여섯번 창당하고 일곱번 넘어져도 좌절하지 않고 여덟번 일어나셨으니 다 이루셨습니다. 삼계개고 아당안지(三界皆苦我當安之) 온 세상이 다 고통에 빠졌으니 내 마땅히 그네들을 편안케 하리라. 선생이 즐겨 읇으시던 금강경의 화두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마땅히 한 곳에 머물지 않고도 그 마음을 낸다는 옛어른들의 말씀.
선생님, 그 고집멸도(苦集滅道)의 화두는 여여하십니까?
2568(2024). 9. 25. 후배 이종률
장기표는 병상에서 큰 딸 장하원이 읽어주는 이 시를 듣고 “이렇게 나를 알아주는 후배가 있으니 나 스스로도 자랑스럽다.”고 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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