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장기표 선생의 '행복론'..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까?"

polplaza 2022. 5. 3.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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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장기표(77) 신문명정책연구원장은 '행복정치론(2020. 행복에너지)' 등 30여권의 책을 저술한 재야 원로이다. 장 원장은 최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새정부 각료 후보자들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문재인 정부와는 많이 다를 것으로 예상했으나, 새정부의 고위공직자들도 별반 다르지 않구나 하는 실망감 때문이다.

장기표 원장이 2022년 5월 3일 SNS에 올린 '장기표의 행복론'을 전재하여 아래에 싣는다.

장 원장은 이 글에서 "결국 인간의 모든 행위는 그 자신의 행복을 위한 것일진대,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것인지를 알아야 할 텐데 그것을 모르는 것 같다"며 "내 나름으로 정립한 행복론이 있어서 이를 올려두어 비록 고위공직자 후보가 아니더라도 참고하는 사람이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따라서, 장 원장의 행복론을 널리 알리는 의미에서 전재함을 밝힌다.

(서재에서 글 쓰는 장기표 원장)


(나는 요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들을 보면서 안타까울 때가 많다. 왜 저렇게 어리석게 살아갈까 싶어서 말이다. 특히 요즘 언론에 보도되고 있는 고위공직자 후보들의 이력들을 볼 때 더욱더 그런 생각이 든다. 그들의 과도한 욕망도 문제지만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지를 모르는 그들의 어리석음이다. 결국 인간의 모든 행위는 그 자신의 행복을 위한 것일진대,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것인지를 알아야 할 텐데 그것을 모르는 것 같아서 말이다. 고위공직자 후보들만의 문제가 아님은 물론이다. 내 나름으로 정립한 행복론이 있어서 이를 올려두어 비록 고위공직자 후보가 아니더라도 참고하는 사람이 있기를 바란다.)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까?
- 장기표의 행복론 -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런데도 행복한 사람은 많지 않다. 돈이 많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으면 행복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인기배우나 스포츠 스타가 되면 행복할 것 같지만, 역시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재벌 회장이나 고위공직자, 인기배우, 스포츠 스타 가운데 고통스럽게 살거나 스스로 인생을 마감한 사람도 많으니 말이다. 심지어 사회적 명예를 크게 얻은 사람조차 행복하지 않은 경우가 대단히 많다.

그런데 재산이나 권력, 사회적 지위나 명예 등에서 특출한 사람이라고 해서 행복한 것도 아니지만, 설사 그런 사람이 행복하다 하더라도 그러한 사람만 행복한 세상이 되어서도 안 된다. 모든 사람이 행복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오래 전부터 이런 생각을 해왔다. ‘평범한 사람이 평범한 생활 속에서 평범한 행복을 누리며 사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 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평범한 삶에서 평범한 행복을 누리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행복이 되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모든 사람이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돈과 권력, 사회적 명예 등을 얻어야 행복하게 된다면 그것을 얻기 위해 소모적인 경쟁을 하게 되어 불행해지는 사람이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불교만 그런 것은 아니지만, 특히 불교에서는 현재의 생활 곧 ‘지금 여기’가 극락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각자가 현재 살고 있는 삶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대단히 옳은 지적이다. 보람과 기쁨이 없는 삶은 없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든 ‘지금 여기’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삶을 살더라도 거기서 보람과 기쁨 곧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보람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같거나 비슷한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어떤 사람은 거기서 행복을 누리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거기서 불행을 느끼는 경우가 있는데, 전자는 행복의 지혜를 갖고 있기 때문이고 후자는 행복의 지혜를 갖고 있지 못한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행복해야 하고, 현재의 삶 곧 ‘지금 여기’에서 행복을 누려야 한다고 해서 슬픔과 분노, 외로움과 불안 등이 없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슬픈 일, 분노할 일, 외로운 일, 불안한 일 등이 있더라도 그것을 극복하는 데서 보람과 기쁨 곧 행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지혜다. 슬픔과 분노, 외로움 등이 아예 없는 삶에서는 행복을 누리기가 오히려 어렵다. 행복은 슬픔과 분노 등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경우가 대단히 많기 때문이다. 인간이면 누구나 느끼게 마련인 오욕칠정을 느끼는 인간적인 삶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지 오욕칠정을 초월한 초인적 삶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행복할 수 있을까? 행복하게 사는 것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니지만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유명 철학자들이 제시한 행복론 곧 행복하게 사는 방법도 엄청나게 많거니와, 특히 불교, 기독교 등 종교는 대부분 완전하고도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고 대부분의 사람은 불행하게 살고 있는데, 왜 그럴까? 더욱이 과학기술의 혁명적 발달로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경제적 풍요를 누리게 되었고, 또 정보통신수단의 획기적 발달로 대중의 사회정치의식 또한 크게 고양되어 있어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경제적 조건이 갖추어진 것 같은데도 말이다.

정치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함으로써 대량실업, 소득양극화, 환경파괴, 인간성 상실 등이 구조화하여 국민의 갈등이 심하고 사회가 불안스러운 것도 행복하게 살 수 없는 중요한 원인이지만, 이에 못지않게 우리들 개개인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갖추지 못하는 것도 중요한 원인이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환경이나 주변여건을 조성하기 위한 노력도 해야 하지만. 사회환경이나 주변여건과 상관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갖추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사회환경이나 주변여건이 아무리 잘 이루어져 있더라도 행복할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갖추고 있지 못하면 행복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회환경이나 주변여건이 나쁘더라도 행복할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갖추고 있으면 행복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더 그렇다. 더욱이 사회환경 내지 주변여건은 나의 노력만으로 개선하기가 어렵지만,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마음의 자세는 나의 노력만으로 갖출 수 있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행복은 만족에 있다(Happiness lies in contentment)”는 말이 있다. 행복은 주관적인 것이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 말이 꼭 맞는 말은 아니지만 상당 부분 맞기도 하다. 남들이 보기에 아무리 행복할 것으로 보여도 주관적으로 행복하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아무리 불행할 것으로 보여도 주관적으로 행복하면 행복할 수 있으니 말이다.

더욱이 아무 어려움이 없어야 행복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다. “행복은 아무 어려움이 없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에 대처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Happiness is not in the absence of the problems, but in the ability to deal with it)”고. 딱 맞는 말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아무 어려움이 없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누구에게나 어려움은 있게 마련이다. 불만과 갈등, 슬픔과 불안 등이 있게 마련이고, 또 어느 정도까지는 이러한 어려움이 있어야 행복할 수 있다. 이런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 속에서 보람과 기쁨을 누림으로써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상황이나 주변여건과는 상관없이 개인적으로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갖추어야 행복할 수 있겠는지를 밝혀보고자 한다. 행복할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갖추기 위해서는 지혜로워야 한다. 이런 점에서 행복은 지혜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거듭 강조하는데, 행복한 삶을 살려면 지혜로워야 한다.

(남한산성을 돌고있는 장기표 원장)


첫째, 자존감을 가져야 한다.

자신을 존엄한 존재로 인식하는 자존감이 없고서는 결코 행복할 수가 없다. 자기가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서야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는가? 자존감을 가진 사람은 당연히 자기를 사랑하기도 한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자존감을 갖는 데는 조건이 없다. 자기가 착한 사람이어야 하거나 지혜로운 사람이어야 하는 등의 조건이 필요 없다. 자기가 어떤 사람이든, 그리고 남이 자기를 어떤 사람으로 보든 상관없이 자존감을 가져야 한다. 누구나 자존감을 가질 만한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가 어떤 사람이건 자기로서는 자기를 존엄한 존재로 인식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래서 자기는 좀 모자라는 사람으로 생각되는데도 자존감을 가질 수 있겠는가라는 반문이 있을 수 있다. 좀 모자라는 사람으로 인식된다고 해서 존엄한 존재로 인식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돈이 많건 적건, 지식이 있건 없건, 심지어 도덕적이건 부도덕적이건 인간인 한 존엄한 존재이다. 다만 자기가 존엄한 존재임을 모르거나 느끼지 못할 뿐이다. 그래서 누구나 자기가 존엄한 존재임을 알고 그것을 느낄 수 있게 해야 한다.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존엄한 존재임을 알고서 자존감을 가져야 한다.

모든 사람이 존엄한 존재이고, 그래서 자존감을 가져 마땅하다는 것을 가장 확실하게 밝혀주는 말이 있으니, 부처님의 탄생게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곧 천상천하에 있는 모든 존재는 자기 스스로 존엄한 존재라는 것이다. 다른 무엇이 자기를 존엄한 존재로 인정해주고 말고 할 것 없이 자기 홀로 곧 스스로 존엄한 존재라는 것이다. 이런 마음 곧 자기가 이 세상에서 가장 존엄한 존재라고 인식해야 행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의 이 말씀은 부귀를 누리는 사람만 존엄한 것이 아니라 비천한 사람도 존엄하고, 사람만 존엄한 것이 아니라 동물, 식물도 존엄하며, 낙락장송만 존엄한 것이 아니라 그 아래에 있는 이끼나 벌레도 존엄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심지어 생물만 존엄한 것이 아니라 무생물도 존엄하다는 것이다. 천상천하에 있는 모든 존재가 존엄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존엄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라는 것이다. 그래야 해탈해서 극락 곧 행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자신이 존엄한 존재임을 깨달아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학습과 수행이 필요하다.

그런데 자기가 생각할 때 자기는 나쁜 짓을 많이 해서 존엄한 존재일 수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실제로 나쁜 짓을 한 사람이 많다. 이런 사람들도 존엄한 존재일까? 그렇다. 이런 사람도 당연히 존엄한 존재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는 존엄한 존재이기 때문에도 존엄한 존재이지만, 설사 나쁜 짓을 많이 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다 규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쁜 짓과는 별개로 존엄한 부분을 간직하고 있기 마련이어서 누구나 존엄한 존재이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결점을 갖고 있다. 결점이 하나도 없어야만 존엄한 존재라면 이 세상에 존엄한 존재가 있기는 어렵다. 그래서 스스로 생각해서 결점 곧 부족한 점이 많이 있더라도 그것 때문에 존엄한 존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모든 존재는 존엄한 존재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둘째, 자기의 정체성이 있어야 한다.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서 자기를 유지해야 행복할 수 있다. 자기가 있어야 행복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없는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자기의 정체성이 없으면 끊임없이 다른 사람을 닮으려 하게 되는데, 이래서는 자기가 초라해질 수밖에 없어 행복할 수가 없다. 자기를 부정하고서는 행복할 수가 없다.

현대인들에게 있어 가장 큰 문제는 자기의 정체성이 없는 것이다. 자기의 정체성이 없으니, 유행에 민감해서 남 흉내나 내려고 한다. 자기의 정체성이 없이 남 흉내나 내서는 결코 행복할 수가 없다.

정체성에는 고유성이 있을 뿐 우열이 있을 수 없다. 이 사람에게는 이 사람의 정체성이 있고, 저 사람에게는 저 사람의 정체성이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정체성과 비교해서 열등감을 갖거나 우월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다른 사람의 정체성과 비교해서 열등감이나 우월감을 갖게 되면 다른 사람을 시기하거나 무시하게 되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이 잘하면 그것을 함께 기뻐할지언정 시기하거나 질투할 일이 아니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고 말했는데, 타인을 의식해서는 나의 실존을 인식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불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와도 상관없이 스스로 자신의 실존을 깨달아야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자기의 정체성을 확고히 유지해야 한다. 그래야 자존감도 생기고 행복할 수도 있다.

(등산복 차림의 장기표 원장)


셋째, 소유와 소비, 지배와 착취에서 보람과 기쁨을 얻는 가치관이 아니라 창조와 생산, 봉사와 절제에서 보람과 기쁨을 얻는 가치관을 정립해야 한다.

행복한 삶을 사는 데는 올바른 가치관의 정립이 대단히 중요하다. 인간의 삶에 필요한 물자 곧 재화와 용역이 부족하던 때는 더 많이 소유하거나 더 많이 소비하는 것 또는 남을 지배하거나 남의 것을 착취하는 것이 자신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삶에 필요한 물자 곧 재화와 용역이 충분하게 된 오늘날에는 더 많이 소유하거나 더 많이 소비하는 것 또는 남을 지배하거나 남의 것을 착취하는 것이 오히려 자신의 행복을 증신시키는 데 역행하게 되었다.

인간은 하루에 밥을 세 깨를 먹어야 행복한데 하루에 네 끼, 다섯 끼를 먹게 되면 고통스럽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창조하거나 생산하는 것 또는 봉사하는 데서 보람과 기쁨을 누리는 것은 쉽게 이해될 수 있으나, 절제는 고통으로 생각되기가 쉽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절제야말로 인간에게 무한한 기쁨을 안겨준다. 절제는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타인에 대한 사랑 곧 타인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넷째, 자아실현의 일을 해야 한다.

인간이 행복해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자아실현이다. 인간은 누구나 본질적으로 자아실현의 욕구를 갖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곧 자아실현을 해야 그 속에서 보람과 기쁨을 누려 행복할 수 있는 존재다. 그래서 만약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아무것도 없어 아무 일도 하지 않게 되면 행복할 수가 없다. 이런 점에서 인간이 자아실현을 통해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숙명 내지 본성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데, 이 마음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유의지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 곧 자유의지를 갖고 있는데, 이것이 동물과 다른 인간의 특성이요 특권이다.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특권인 이 자유의지를 발현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 자유의지의 발현이 일이나 활동이고, 이 자유의지의 발현인 일이나 활동을 통해 자아실현을 함으로써 그 속에서 보람과 기쁨을 누림으로써 행복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일 곧 활동이야말로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수단이다. 일을 해야 자아를 실현할 수 있고, 자아를 실현하게 되면 보람과 기쁨을 누려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모든 행위의 목적은 행복인데, 이 행복은 자신의 잠재능력과 가능성을 삶 속에서 실현할 때 얻는 자기완성적 상태 곧 ‘유다이모니아(eudaimonia)’에서 이루어진다고 밝혔다. 즉 자아를 실현해야 만족을 느껴 행복하다는 것이다. 자아실현에 행복이 있음을 가장 먼저 밝힌 철학자라 하겠다.

성경에 의하면 인류의 시조 아담과 이브는 어떤 불만이나 불안도 없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수고 곧 일을 해야 먹을 것, 입을 것 등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데,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 왜 이렇게 했겠는가? 하느님이 이렇게 한 것은 아담과 이브가 하느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아서라기보다 인간은 수고하면서도 일을 해서 자아실현을 해야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하느님은 인간을 미워하거나 벌주기 위해서 에덴동산에서 쫓아낸 것이 아니라 인간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쫓아냈을 것이다.

그래서 성경의 이 말씀은 인간은 숙명적으로 일을 함으로써 행복할 수 있는 존재임을 말해주고 있다 할 것이다. 일 곧 활동이 이처럼 행복의 원천인데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살 수 있으면 가장 행복할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대단히 많은데, 이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일을 하지 않고는 자기의 취향을 실현하거나 능력을 발휘할 수가 없으니, 행복할 수가 없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는 자아실현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을 하지 않고 살 수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이 많은 것은 그동안 너무 많은 일을 한 데 따른 반작용일 뿐, 사람은 본성적으로 일을 하고 싶어 하게 되어 있다. 인간은 자아실현의 욕망과 이를 구현할 자유의지를 타고났고, 이 자유의지를 발현하는 것이 일이며, 일을 해야 자아를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업자로 있으면 일을 하고 싶어 죽을 지경인데, 이것은 월급을 받고 싶어서라기보다 일 자체를 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을 하지 않음으로써 행복하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무항산 무항심(無恒産 無恒心)’이란 말이 있다. 생산적인 활동을 계속하지 않으면 바른 마음을 가질 수 없다는 말이다. 아주 맞는 말이다. 생산적인 활동 곧 일을 해야 바른 마음을 가질 수 있고, 바른 마음을 가져야 행복할 수가 있다.

그런데 누구나 자아실현이 되는 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으나,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을 수 없는 경우가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일은 나름대로 의미를 지니고 있고, 또 인간은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어딘가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을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리고 어떤 일도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자아실현이 될 수 있다.

일에 귀천이 있을 수 없다. 어떤 일도 사람에 따라서는 자아실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학문탐구도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자아실현이 될 수 있지만 학문을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자아실현이 될 수 없다. 농사일도 농사일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자아실현이 될 수 있지만, 농사일을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고통이 될 수 있다. 자아실현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하지 어떤 일이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또 직위가 높거나 낮은 것도 중요하지 않다. 사장은 사장의 역할을 잘 수행하면 자아실현이 되어 행복할 수 있고, 사장의 역할을 잘 수행하지 못하면 자아실현이 되지 못해 고통스럽게 된다. 사원도 마찬가지다. 사원으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하면 사장 못지않게 자아실현을 해서 행복할 수가 있고, 사원으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하지 못하면 자아실현이 되지 못해 고통스러울 수 있다.

일을 하더라도 자기의 취향이나 재능을 실현하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먹고살기 위해 마지못해 일을 하는 경우가 많으나, 이런 일도 하는 것이 낫고, 또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이런 일을 하는 것도 자아실현이 될 수 있다. 그리고 혼자 있을 때도 무료하게 보내기보다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행복할 수 있다. 생각을 하더라도 의미 있게 하면 그것은 일이 되고, 그 속에서 보람과 기쁨을 누리게 된다.

그런데 인간만이 갖고 있는 이 자유의지는 인간이 본능에서 벗어나 자신의 의지대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특권이기도 하지만, 이에 따른 책임도 인간이 져야 한다. 남을 괴롭히는 일을 해서 처벌을 받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자유의지는 인간에게 부담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인간은 자유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마음을 가질 때도 있는데,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자유로부터 도피해서는 결코 행복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즉 자유 곧 자아실현을 통해서만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아실현에서 최고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은 모든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돈이나 권력, 명예 등은 차별적일 수밖에 없다. 한 사람이 그것을 가지면 다른 사람은 그것을 갖지 못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자아실현은 그렇지 않다. 모든 사람이 자기 나름의 자아실현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자아실현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자아실현이 최고의 행복일 때 모든 사람은 행복할 수가 있다.

다섯째, 일의 결과보다 일하는 과정에서 행복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 일을 한다. 그 일이 이루어질 때도 있고 이루어지지 않을 때도 있다. 그 일을 이루면 행복하고, 이루지 못하면 불행할까? 그렇지 않다. 이루면 당연히 행복하지만 설사 이루지 못하더라도 그 일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보람과 기쁨을 누림으로써 행복할 수 있고, 또 그렇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일을 이룰 때만 행복하고 그 일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는 행복할 수 없다면 인간은 행복하기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도 어떤 일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행복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매달 산행하는 장기표 원장)


여섯째, 남을 사랑해야 한다.

인간이 행복해지는 데 있어 사랑이 대단히 중요하다. 남에 대한 사랑이 없이는 행복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남(상대방)을 사랑하게 되면 마음이 평화로워져 행복하게 된다. 마음의 평화야말로 행복의 절대적인 조건이니 말이다.
남을 사랑한다는 것은 나와 남을 하나로 인식하는 것이다. 나와 남을 하나로 인식하게 되니, 상대방에 대해 적대감을 갖지 않게 되고, 그래서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되니, 행복하게 된다. 여기에다 나와 남을 하나로 만들어 주는 것이 사랑이니, 내가 세상을 사랑하게 되면 세상이 내가 되기도 하고 내가 세상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사랑은 사랑의 감정만으로는 부족하다. 구체적 행동이 따라야 한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은 물론 상대방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정신적으로는 물론 물질적으로도 도와야 한다. 상대방을 위해 자기 것을 내놓음이 없이 말로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기 쉽다.

사람은 ‘사랑을 받아서’ 행복하기보다 ‘사랑을 해서’ 행복한 것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물론 남의 사랑을 받을 때도 마음의 평화를 얻어 행복할 수는 있지만, 사랑을 받는 것으로는 자아실현이 될 수는 없어 근본적인 한계를 지니게 된다. ‘사랑을 하는 것’은 자아실현이 되니 행복하게 된다.

성경의 부자청년 예에서도 예수께서 부자청년에게 그가 가진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고 한 것은 가난한 사람의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부자청년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부자청년이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준다고 해서 가난한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자도 석가도 예수도 사랑을 강조했는데, 사랑이야말로 행복 곧 해탈과 구원에 이르는 가장 확실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랑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랑은 자기사랑이다. 남도 사랑해야 하지만 사실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라야 남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존감도 갖게 되고 자기의 정체성도 확립해 있게 되니 더욱더 그렇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나쁜 짓을 하지 않게 된다. 나쁜 짓으로 자기를 더럽히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존감을 행복의 제일 조건으로 내세운 것도 자존하는 사람이라야 남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야말로 사람이 행복해지는 데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자기사랑과 이기심은 정반대이다. 이기심은 자기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망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정치가 제 역할을 하도록 노력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정치야말로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사회환경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정치는 사랑이다’거나 ‘정치는 사랑의 사회적 실천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자기의 부모형제와 자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정치가 잘 되게 노력하게 된다. 정치가 잘 되어야 자기의 부모형제와 자녀가 좋은 사회환경에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일곱째, 고난과 시련을 겪더라도 그것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기보다 그것을 담담히 받아들이거나 극복하는 데서 자아실현의 보람과 기쁨을 누려야 한다.

인생살이에 고난과 시련은 있게 마련이다. 그 고난과 시련을 받아들이거나 극복하는 노력 속에서 자아실현의 보람과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 행복할 수 있다.

고난과 시련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고난과 시련 때문에 행복할 수 없다면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 이웃에 ‘저 사람 같으면 아무 걱정이 없이 행복하기만 할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많다. 돈도 많고 사회적 지위도 높고, 또 가정도 화목한 것 같아서 말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한테도 고난과 시련 내지 고민거리가 있게 마련이다. 객관적으로 고민할 만한 일이 없으면 고민거리를 만들어내어서라도 고민하는 것이 인간이다. 고민이 있어야 발전이 있고, 고민이 있어야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자아실현의 보람과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고난과 시련이 없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그 고난과 시련을 참고 수용하면서 극복하는 것을 통해 보람과 기쁨을 얻도록 해야 한다.

고난이 있기 때문에 기쁨이 있고, 불행이 있기 때문에 행복이 있음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일을 하는 데서 보람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일을 하는 과정에 수고가 있기 때문이듯이 말이다.

고난 곧 고통스러운 일이 있을 때는 그것을 담담히 받아들이거나 극복함으로써 보람과 기쁨을 누리기도 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오히려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기회로 삼아서 더 큰 행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고난이 오히려 행복의 원천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전화위복할 수 있는 마음의 자세와 능력 곧 지혜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쉬운 것은 아니지만 훈련하면 반드시 그렇게 될 수 있다.

여덟째, 자연의 이법, 우주의 섭리에 따라 살아야 한다.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하기 위해서는 자연의 이법, 우주의 섭리에 따라 살아야 한다. 생태주의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도(道)에 입각한 삶이기도 하다. 자연의 이법, 우주의 섭리가 곧 도이기 때문이다. 도에 입각해 산다는 것은 도인의 삶을 산다는 것인데, 도인의 삶을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도 하지만 쉬운 일이기도 하다. 헛된 욕망이 없이 일상의 삶을 순리대로 사는 것이 도인의 삶이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메르스, 사스, 코로나 등으로 전 세계적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데, 이것은 인간이 자연의 이법에 따라 살지 않은 때문이다. 인간은 자연과 상생해야 하는 것인데도 인간이 자연을 훼손, 파괴했기 때문에 이런 질명이 인류를 괴롭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코로나19는 인류에게 경고하고 있다. ‘자연의 이법에 따라 살아서 행복할래? 아니면 자연을 파괴하는 삶을 살아서 사회는 붕괴하고 인생은 파탄하는 대재앙을 맞을래’라고 말이다. 더 많은 소유와 더 많은 소비를 위해 자연을 훼손, 파괴할 경우 인류는 이런 재앙을 면할 수가 없을 것이다. 설사 코로나19가 끝난다 하더라도 코로나19와 유사한 팬데믹이 도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연의 이법에 따라 살기 위해서는 자연과 인간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상생한다는 세계관을 가질 필요가 있다. 지난날은 물질과 정신은 분리되고, 자연과 인간은 상생하며, 가진자와 못가진자는 투쟁한다는 대립과 투쟁의 이원적 세계관이 통용되어 왔고, 또 그럴 필요도 있었으나, 이제는 물질과 정신은 통일되고, 자연과 인간은 상생하며, 가진자와 못가진자는 대동을 이룬다는 통일과 상생의 일원적 세계관을 정립해서 가져야 하겠기 때문이다.

(서민 교수와 함께)


아홉째, 모든 사람이 행복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행복할 수 있을까? 그러기가 어렵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행복해야 나도 행복할 수 있다면 누구도 행복할 수가 없을 것 아닌가 하는 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행복하지 못해도 자기는 행복할 수가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인간은 모든 사람이 행복해야 자기도 행복할 수 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본성상 연민의 정을 갖고 있어서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면 자신도 고통스럽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맹자는 말하기를 ‘인간에게는 불인지심(不忍之心) 곧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마음이 있다’고 했는데,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이 그것이라고 했다. 인간은 누구나 측은지심 곧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면 그것을 측은하게 생각해서 그도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혹 이런 마음이 없다면 그런 사람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니 행복하지 못한 사람이 있고서는 자기도 행복하기가 어렵다. 모든 사람이 행복해야 자기도 행복할 수 있다.

국부론의 저자 아담 스미스도 도덕감정론이란 책에서 인간은 다른 사람과 공감하는 마음을 본능처럼 지니고 있어서 이웃에 불행한 사람이 있으면 자신도 불행한 마음을 갖게 된다고 했다. 흔히 스미스는 인간의 이기심만을 강조한 사람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정반대다. 이기심보다 훨씬 더 강한 인간 본성으로서의 공감(Symphathy)의 마음을 갖고 있다고 했다.

‘인간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는 전태일이란 사람은 이런 말을 한 일이 있다. ‘나는 조금만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마음이 언짢아 그날은 기분이 우울한 편입니다’라고. 어찌 전태일 만이겠는가? 이런 마음이 인간의 본성이다. 인간은 누구나 본질적으로 불쌍한 사람을 보면 마음이 언짢고 연민의 정을 느끼게 되어 있다.
그래서 주위에 불쌍한 사람이 있으면 자신도 행복할 수가 없다. 모든 사람이 행복해야 자신도 진정으로 행복할 수가 있다.

끝으로 위와 같은 행복관을 갖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습관은 제2의 천성인지라, 사람의 생각은 바뀌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단순히 아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반복해서 훈련해야 한다. 자존감을 갖고, 정체성이 있으며,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일에서 자아실현의 보람과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남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모든 사람이 행복하도록 노력해야 하며, 고난과 시련을 당하더라도 한편으로는 그것을 담담히 받아들이거나 극복하는 데서 보람과 기쁨을 얻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에서 전화위복할 수 있어야 하며, 무엇보다 자연의 이법에 따라 살도록 노려해야 한다.

아무쪼록 어떤 사회상황이나 주변여건에서도 올바른 행복관을 정립해서 실천함으로써 행복하기를 바란다.*

(참을 수 없는 웃음을 터트리는 장기표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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