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장기표, 고 김지하 시인 추모사(전문)

polplaza 2022. 5. 11.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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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장은 2022년 5월 11일(수) 연구원에서 주최하는 회의에 늦게 나타났다. 평소에는 30분 전 일찍 나오는데, 이날은 회의 시작시간이 됐는데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회의 시작 후 15분쯤 지나서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일성이 "늦어서 미안하다"였다.

장 원장은 김지하 시인을 추모하는 글을 쓰다가 중간에 멈출 수가 없어서 다 쓰고 오느라 늦었다고 해명했다. 지난 5월 8일 타계한 김 시인의 장례식이 열리는 발인날이 바로 이날이었다.

장 원장은 "살면서 어떤 일이 있어도 죽는다는 것, 문상을 최대 일이고 제일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앞서 그는 김 시인의 타계소식을 듣고 다음날 새벽 6시에 서울에서 출발해 원주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다른 일정 때문에 새벽이 아니면 시간을 내기 어렵자 새벽시간을 선택한 것이다.


장 원장은 추모사에서 고인의 탁월한 생명사상과 동서양을 아우르는 철학사상을 기반으로 한 동학사상의 해석에 많은 공부를 했다고 감사를 표하면서, 1974년 민청학련 사건 때 장 원장이 쓴 ‘민중의 소리’, 1996년 신문명정책연구원 창립 때의 인연 등 후일담을 회고하면서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장기표 원장이 이날 SNS에 올린 '고 김지하 시인 추모사' 전문은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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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가 노벨상을 받지 못한 게 내게는 한이다!
김지하 시인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서 참으로 안타깝고 가슴이 아프다. 무엇보다 김 시인이야말로 노벨문학상을 받아 마땅한 인물이었는데, 그러지 못했으니 말이다. 노벨문학상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남긴 작품과 사상이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으면 해서다.

그리고 가슴이 아픈 것은 그의 업적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이런저런 구설수에나 오르는 처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자업자득이지만 말이다. 그는 대단히 탁월했지만 결점도 대단히 많았다. 천재 특유의 편집증일 수도 있고, 예술가에게서 잘 나타나는 괴팍함일 수도 있는 독특한 성격 때문에 그의 진가를 떨어뜨리는 일이 너무 많고 또 큰 것 같았다. 좀은 참았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아무튼 그의 민주화투쟁과 문학이 한국 민주화에 기여한 공에 대해서는 새삼스럽게 들먹일 필요가 없다. 너무나 분명하고 또 많이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내가 그의 죽음을 계기로 꼭 기록해두고 싶은 것은 그의 탁월한 생명사상이다. 동학사상에 그 원류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그의 생명사상은 현대사회에 꼭 실천되어야 할 사상이겠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명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동식물과 무생물의 생명도 다 소중하다는 것을 밝히면서, 그 이유는 모든 사물 하나하나 안에 우주적 생명이 들어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모든 생명을 공경해야 한다는 것이니, 이런 사상을 실천할 때 갈등과 양극화 문제, 그리고 지구환경파괴 문제 등이 해결될 수 있겠기 때문이다.

그는 동서고금 곧 동양과 서양, 고대와 근대, 그리고 현대의 철학사상에 대해 정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해박한 지식에 기반하여 동학사상을 해석한 글이 많은데, 나는 거기서 많은 공부를 했다. 지금도 깊이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는 1990년대에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에 겐자부로와 대담을 한 적이 있는데, 나는 그 대담을 읽으면서 정말 자랑스러웠다. 오에 겐자부로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했지만 사회문제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진 실천적 지성인이어서 한국에서 김지하 씨가 아니었다면 그 누구도 그와 맞수가 될 수 없을 것 같았는데, 김지하 씨가 오에 겐자부로보다 한 수 위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와는 꼭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고비고비마다 중요한 교감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생명사상에 나오는 ‘시장의 성화’가 나의 민주시장주의를 정당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1996년 내가 신문명사상에 기초한 신문명정책연구원을 설립할 때도 큰 힘이 되었다. 창립 기념 정책토론회를 개최했는데 김 시인이 발제를 맡아주었다. 오래 만에 일산에 있는 그의 집에서 그를 만났는데 근방에 있는 좋은 식당으로 가서 ‘신문명’과 관련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아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기피하고 있을 때였고, 또 사람을 만나도 30분 이상 만나는 것을 기피하고 있던 때였는데도 나와 두세 시간 이상 이야기 했다. 그만큼 의기가 크게 투합 되었기 때문임은 물론이다. 그가 말했다. ‘내가 많은 것을 생각해 둔 것이 있는데 그것을 표현할 나팔수가 없어 고민했는데 장 선생이 나타나 내 나팔수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무척 기쁘다’고 했다. 그리고 ‘발제문을 써야 하는데 내가 건강이 좋지 않아 못 쓰겠으니 장 선생이 쓰면 내가 가필하겠다’고 했다. 나로서는 김지하 시인의 발제가 꼭 필요해서 그의 요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책을 거의 다 구해다 읽고서 ‘문명의 전환 새로운 비전’이란 주제로 발제문을 작성했는데 그가 보고서 한자도 고치지 않고서 그대로 그 발제문을 발표했다. 그와 나의 생각이 그만큼 같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밖에도 그는 나로 하여금 그의 사상을 깊이 이해하고 수용해주기를 간절히 바란 것 같았다. 몇 년 전에 원주에 갔을 때 그의 여성론(?) 곧 여성의 역할이 중요함을 강조한 메모로 된 글을 나에게 주기도 했는데 제대로 읽지 못해 죄송한 마음이다.

글을 쓰다 보니 생각이 나는데 나는 1974년 민청학련 사건 때 ‘민중의 소리’라는 시도 아닌 시를 김병곤에게 주어서 민주화투쟁에 쓰도록 했는데, 그 시도 아닌 시를 김지하 시인이 쓴 것으로 알려졌다. 김지하 시인이 아니고는 그런 시를 쓸 사람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일어와 영어로까지 번역된 일이 있었다. 나중에 중앙정보부 수사에서 내가 쓴 것으로 밝혀져, 그 덕분에 나는 일약 국제펜클럽이 추천한 시인이 된 적이 있다. 국제펜클럽에서 나의 구명운동도 해주었으니 김지하 시인의 덕을 톡톡히 본 것이다.

폐일언하면 그의 명복을 빌고, 그의 탁월한 사상이 빛을 보아 오늘의 문명사적 위기를 극복하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바쁘다는 핑계로 제대로 된 추도문을 쓰지 못해 송구한 마음 그지없다. 용서를 빕니다.

2022년 5월 11일

장 기 표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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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의 SNS 김지하 추모사 전문 캡처}

 

(김지하 시인의 친필/장기표 SNS)

 

(김지하 시인의 친필/장기표 S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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