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청광 김용대 화백의 민화.. 닭 그림

polplaza 2022. 5. 20.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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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도'로 유명한 청광 김용대 화백(1939.-2014.4.8)이 닭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됐다. 김 화백이 초기에 민화를 그렸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실물로 그의 닭 그림을 본 것은 처음이다.

어느 날, 늦은 퇴근 길에 담배를 피우기 위해 집 앞의 흡연장소로 갔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흡연쯤 된다. 물론 가끔 새벽에도 담배피우러 나오기도 한다. 쭈그리고 앉아서 담배를 피우는데, 폐기물을 버리는 곳에 큰 그림 액자가 보였다. 닭종류의 그림 같았다. 깃털이 대부분 검은색이어서 '오골계' 같기도 했다. 핸드폰 후레시로 비추어보니 '청광(淸光)'이라는 한자와 낙관이 보였다. 낯익은 글씨체와 낙관이었다. 청광 스님이 그린 작품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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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저 그림을 버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무로 된 액자틀은 흠집이 있고, 옆면에는 허연 먼지가 쌓여있었다. 집의 한쪽 구석에 있다가 이사를 가면서 버린 것 같았다. 큰 유리 액자를 걸어두기 힘들거나, 그림에 취향이 없다면 '짐'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대로 내버려두면 페기물로 처분될 위기에 처한 것 같았다.

일단, 집으로 들어갔다. 아내에게 '청광' 스님의 닭 그림을 누가 버려서 찾아올까 한다고 했더니, 집에는 들고 오지 말라고 했다. 문 밖에 뒀다가 사무실로 가져가든지 하라고 했다. 큰 유리액자를 집에 가져와서 걸어둘 데가 없다는 것이다.

스님으로도 불리는 청광 화백과의 과거 인연이 주마등 처럼 지나갔다. 우연히, 아주 우연히 청광 스님의 그림을 눈앞에 두고, 폐기물로 처리될 상황을 모른 척 내버려두는 것은 예의가 아닌 듯했다. 다음날 아침에 챙겨보기로 하고 TV를 보는데 계속 마음에 걸렸다.

담배와 라이터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대문을 열자 구청에서 나온 폐기물 수거차량의 엔진 소리와 폐기물을 싣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이사하면서 버리고 간 책장, 의자, 서랍장 등 중고가구들을 싣고 있었다. 폐기물 수거현장에 내려왔더니 다행스럽게도 액자는 아직 한쪽에 그대로 있었다.

(청광 화백의 닭 그림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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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고민했다. 저 그림을 어떻게 할까하고.
어쨌든 그림을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위작일지라도 청광 스님의 낙관이 있는이상 수수방관할 수 없었다. 폐기물을 옮기는 미화원에게 "이 그림 제가 가져가도 되나요?"하고 물었다. 미화원 아저씨는 나를 쳐다보는둥마는둥 다른 폐기물을 들면서 "그러세요"하고 흔쾌히 승락했다. 그는 그림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나는 액자를 한 쪽으로 옮긴 후, 어떻게 집 안으로 가져갈까 하고 궁리를 했다. 액자 뒷면의 종이색이 바래져 있었고, 먼지가 쌓여있어서 집 안으로 들고갔다간 아내에게 야단맞기 십상이었다. 그런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액자와 유리를 해체하여 그림만 챙기자.' 액자와 유리를 버리기로 한 것이다. 욕심을 없애니 쉽게 해결됐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 방법이 최선인 것 같아 안도감이 들었다. 청광 스님이 계시를 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문제는 액자에서 그림을 어떻게 분리할 것인가였다. 유리를 깨서 그림만 빼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마침 그 때, 관리실 수위 아저씨가 후레시를 들고 다가왔다. 폐기물 차량이 폐기물을 잘 싣고 가는지 확인하기 위해 나온 것이다.


나는 아저씨에게 "이 그림은 누가 이사 가면서 버린 건가요?"라고 물었다. 아저씨는 "이사간 것은 아닌 것 같아요. 다른 곳으로 가서 다시 올 겁니다"라고 했다. 집을 수리하면서 다른 곳으로 잠시 가는 바람에 오래된 가구들과 함께 그림도 버린 것 같다고 했다. 내가 그림을 떼려고 애쓰자, 아저씨는 관리실로 돌아가서 드라이브 등 장비를 챙겨와서 액자 뒤에 박힌 못을 빼는 일을 도와주었다. 일단, 액자와 유리를 분리해서 폐기물 처리 아저씨들에게 넘겨주었다.

그런데 그림은 나무로 짜여진 판에 이중으로 붙어 있었다. 부피를 최대한 줄여야 했다. 그림 뒤를 받친 나무틀을 과감하게 제꼈더니 툭 떨어졌다. 마침내 그림을 붙인 나무판 하나만 남게 됐다. 나는 나무판에서 떨어진 종이조각을 주섬주섬 주워 폐기물 차량에 실어주었다. 땅바닥에 떨어진 작은 종이 조각은 수위 아저씨가 가져온 쓰레기봉지에 담아서 치웠다.

(청광 김용대 화백의 닭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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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기물 수거차량이 버려진 가구를 모두 싣고 떠나자 그림과 나만 남게 되었다. 이 그림이 진짜 청광 스님이 그린 그림이 맞을까 하는 의문이 남았지만, 일단 폐기물로 처리되는 것을 막았다는 점에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청광 스님의 그림이 맞다면 대단한 우연이자 기적이 아닐 수 없다. 만일 새벽에 피곤하다고 잠을 자버렸다면, 이 그림은 폐기물 차량에 실려 어디론가로 사라졌을 것이다. 세상에서 영원히 없어졌을 지도 모른다. 폐기물을 싣고 있던 그 순간, 나를 통해서 이 그림이 세상에 남게 된 것이다.

얼마나 기적이고, 행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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