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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전 참전 용사 장기표,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려"

polplaza 2021. 2. 23.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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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어느 겨울 밤, 나는 동숭동 대학로를 끝없이 걷다 서다 하며 베트남 파병부대에 자원 입대하겠다는 그를 온갖 말을 동원해 가며 만류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렸고, 나로서는 역사의 현장을 체험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다'고 하는 마지막 말로 나를 단념시키고 말았다."

서울대 법대 동기생인 고 조영래(1947.3.26~1990.12.12) 변호사가 1988년 10월 6일자 '한겨레신문'에 쓴 칼럼, '장기표는 무슨 죄가 그리 많은가'라는 글에 나오는 내용이다. 조영래는 장기표가 생명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월남전 참전을 만류했으나, 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는 것이다.

장기표는 월남전 참전에 대해 "1967년 9월 월남에 가서 1968년 8월 귀국했다"고 밝혀, 20여 년 전 일을 회상하여 칼럼을 쓴 조 변호사의 '1967년 어느 겨울 밤'은 '1967년 어느 여름 밤'의 기억 착오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된다. 1967년 2월 입대하여 강원도 27사단에 복무 중이던 장기표는 1967년 7월 파월부대인 9사단 백마부대로 차출됐다. 월남 파병 병사들에게 4일 정도 휴가가 주어졌다. 이 휴가 기간에 사회로 나와 조영래를 비롯해 선후배, 동기들과 동아리 회식 모임을 가졌는데, 유독 조영래가 월남전에 가는 것을 만류했다는 것이 장기표의 증언이다.

조영래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장기표의 월남 참전 의사는 확고했다. 서울대 법대생들은 사법고시 준비를 위해 입대를 연장하거나, 면제 사유를 만들어 군복무를 피하거나, 사법시험 합격 후 장교로 군대를 가는 사례가 공공연했던 시기에 장기표는 월남전 파병도 마다하지 않고 자원 입대했다.

당시는 뒷돈을 쓰면 군대를 안 갈 수 있었고, 생명을 건 월남전 파병도 피할 수 있었다. 고시 공부를 위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입대 시기를 늦출 수도 있었다. 장기표는 1967년 군 입대를 지원했고, 월남전까지 참전했다. 당시 돈 3천 원을 주면 빠질 수 있었다고 했다. 장기표는 훗날 "나는 1966년 대학 1학년 때 월남 파병에 반대 데모했던 사람"이라고 회고하면서, "국가의 정책이 결정되면 국민은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국가의 명령으로 참전했다는 뜻이다.

그는 "내가 어릴 때 6.25 전쟁이 났는데, 그때 일부 마을 사람들이 군대에 안 가기 위해 돈을 쓰고 빽을 쓰고 도망가는 것을 보면서 나는 저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심했다"고 했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당연히 국방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각오를 일찍이 다졌던 것이다.

(장기표와 월남 참전 전우들/앞줄 왼쪽에서 3번째가 장기표)

 

장기표는 원래 주특기로 타자병과를 받았다. 사단 사령부에 배치돼야 주특기를 살릴 수 있었다. 그런데, 연대급으로 배치되어 타자병 대신 소총수가 됐다. 백마부대 29연대 51포병대 소총수. 월남 파병에 앞서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오음리에서 전투훈련을 받았다. 아직도 생생한 것은 훈련소에 3대 신조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조국 근대화를 위해 월남에 간다'였다고 한다. 월남 파병의 대가로 한국 정부가 미국의 원조를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장기표는 1967년 9월 부산항 제3부두에서 파월장병들을 실은 군함 수송선(LST)에 올랐다. 여군 합창단이 '잘 있거라, 부산항구야'를 합창하는데, 살아 돌아올지 걱정이 됐다. 군부대 관계자와 장병 가족들의 환송을 받으며 월남으로 떠났다. 

그는 "내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일을 꼽으라면 대한민국 남자로서 신성한 병역의 의무를 완수한 일"이라고 회고했다.

잘 있거라 부산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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