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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전 참전 용사 장기표, 포탄도 피해갔다

polplaza 2021. 2. 26.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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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는 1967년 8월 31일 월남에 도착했다. 그는 이듬해 8월 귀국할 때까지 약 1년 동안 월남에서 복무했다. 백마부대 29연대 배속 51 포병부대 경비소대에서 졸병으로 근무했다. 그해 2월 입대하였으므로, 이등병으로 월남전에 파병된 것이다.

월남전 초기 파병 부대의 막사는 형편없었다. 파병 부대는 '씨레이션 막사'를 지어 밤이슬을 피하고, 그곳에서 잠을 잤다. 레이션 막사란, '레이션(C-rations. 미군의 전투식량)' 박스를 모아서 만든 집 모양의 막사를 지칭한다. 땅을 반지하 정도 파서 포탄 탄피로 기둥을 세우고, 레이션 박스로 벽을 쌓고 지붕을 덮는 형식이었다. 그러나 '부자 나라' 미군에서 지원하는 전투식량 등 보급품은 풍족한 편이었다.

장기표는 포병부대 소속이어서 월맹군과 직접 총격전을 벌이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했다. 낮에는 포탄을 나르거나 벙커를 짓고, 야간에는 보초를 서거나 매복을 나갔다. 전투 작전을 나갈 때도 먼저 포탄을 쏘아 소개작전(疏開作戰)을 펼쳤다. 소개작전이란 작전지역에 숨어있는 적이 포탄을 피해 도망가도록 하는 작전이었다. 포탄 공격을 하고 작전 지역에 들어가면 전투할 일이 별로 없었다. 적이 모두 도망가고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험한 고비도 있었다.

월남 파병 2개월 후인 '유엔데이(국제연합 창설을 기념하는 날, 매년 10월 24일)' 밤에 부대가 박격포 공격을 받았다. 이 공격에 포대장을 비롯해 몇몇 병사들이 크게 다쳐 본국으로 후송됐다.

더 큰 위기는 월맹(북베트남)군이 '구정 대공세'를 펼쳤던 때였다.
1968년초 어느 날 밤 12시. 경계근무를 서러 초소로 나갔다. 졸병이라 주로 취약시간인 밤 12시 근무가 많았다. 겨우 일어나 비몽사몽간에 총을 들고 초소에 들어서자 갑자기 머리 위로 모래 더미가 쏟아졌다. 눈 앞에서 빨간 굉음과 함께 불빛이 지나갔다. 포탄이 막사 주위로 날아가고 터지는 소리였다.

장기표는 영문을 몰라 급히 막사를 향해 달려가면서, "선임하사님, 큰일 났습니다"하고 외쳤다. 학생운동으로 정권에 맞섰던 장기표이지만, 포탄 앞에서는 심장이 콩알만 해졌다. 그러는 사이, 위쪽의 본부중대 경비병이 "박격포 공격입니다"라고 큰 소리로 알렸다. 그제야, 월맹군이 야간 공격을 시작했음을 알아차렸다.

예상 밖의 포탄 공격으로 부대장을 비롯해 일부 병사들이 부상을 당했다. 특히 장기표와 교대했던 병사는 포탄의 파편을 맞아 허리 부상을 입고 후송됐다. 졸병 처지에 부대 전체의 피해 상황을 알 수 없었다. 다행히 장기표는 운이 좋았다. 하늘이 도운 것일까. 다친 곳이 하나도 없었다.

뒤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월맹군의 이날 포격은 훗날 '구정 대공세'로 명명된 대규모 공격의 신호탄이었다. 그는 월남전 참전 중 가장 긴장되고 위태로웠던 월맹군의 대규모 포격 공격에서 살아남았다.

한편, 월맹군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은 1968년 1월 30일 월남군과 미국, 그 동맹국 군대를 향해 대규모 공격을 개시했다. 이른바 구정 대공세 작전이다. 이 작전은 그해 2월까지 이어졌다. 다시 5월부터 8월까지는 2차 공세가 있었다. 구정 공세는 1월 30일부터 2월까지 공세를 지칭하지만, 넓게는 8월 2차 공세까지 포함한다.

그동안 월맹군을 과소평가했던 미국인들은 TV와 신문 등을 통해 구정공세 뉴스를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 월남전이 간단하지 않고 장기화될 것이라는 우려였다. 궁극적으로 미군의 종전과 철수를 가져오는데 전환점이 됐다고 역사는 평가한다.

 

 

(2020.4.15 총선에 출마한 장기표를 응원하기 위해 서울대 법대 입대자 모임인 녹우회가 녹우회 기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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