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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 누구인가.

polplaza 2021. 2. 22.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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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는 해방 직후인 1945년 12월 27일 경남 밀양의 산골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김해로 이사해서 한림초등학교와 진영중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는 진영 한얼고등학교에 입학했다.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2학기부터는 창원시(옛 마산시) 소재 마산공업고등학교로 편입하여, 마산공고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재학 중 수학에 재능이 뛰어나 물리 담당 교사는 서울 공대 화공과 진학을 추천했다. 공대는 졸업 후 취직도 잘 된다고 했다. 그런데 대입 두어달을 남겨놓고 생물 교사가 본인이 하고 싶은 과를 선택해야 한다고 강하게 질책했다. 세상을 바꾸고 싶은 꿈을 펼치려면 법대를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서울대 법대에 시험을 쳤다. 수학에 자신감이 있었으나, 수학 시험지에 나온 문제는 생전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문제를 거의 풀지 못했다. 다른 과목에서 점수를 받았지만, 수학 점수에서 결정적으로 낙방했다.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장)

 

서울대에서 낙방한 그는 동국대학교 법대로 진학했다.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대입 수험생을 대상으로 수학 과외 가정교사를 했다. 시골 출신의 서울 유학생활에는 과외가 큰 도움이 됐다. 그러던 중, 수학 잘한다는 소문이 나서 서울대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을 가르쳐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수학 교재는 일본 수학이었다. 처음 보는 수학책이었다. 서울대 입시 때 봤던 그러한 유형의 문제집이었다. 서울대가 입시 수학 문제를 일본 수학에서 베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문제를 다 풀면 서울대에 합격하겠다 싶었다. 운명이었는지 생각지 못했던 중요한 정보를 얻은 것이다. 서울대에 다시 한번 도전하기로 했다.

서울대 법과대학에 2번 째 도전을 했다. 서울대 입시의 당락은 수학시험이 관건이었다. 수학 시험문제를 받아보니 역시나 고등학교에서 배운 수학이 아니라, 일본 수학책에서 본 것과 유사한 것들이었다. 자신 있게 풀었다. 100점 만점에 90점 이상 받을 것 같았다. 다른 과목들은 점수 차이가 크게 나지 않기 때문에 난이도 높은 수학시험이 당락을 가를 것으로 생각했다. 예상대로 서울대 법대에 최종 합격했다. 한 번은 수학 때문에 떨어지고, 한 번은 수학 덕분에 합격한 셈이 됐다. 마산공고 출신이 당시 서울대 법대에 시험으로 합격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이를 두고 "장기표는 천재다"라는 말이 요즘도 지인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

1966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한 그는 조영래를 만나면서 사법고시와 멀어졌다. 법대를 선택한 것은 사법시험에 합격해서 판검사가 되어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목표 때문이었다. 그러나 1966년 9월 '삼성 사카린 밀수사건'이 터져 이를 규탄하는 성토대회를 조영래와 함께 준비하면서, '사회 부조리'에 분노하고 이를 바로 잡으려는 소위 학생운동의 중심권으로 급속하게 이동했다. 부와 명예가 보장되는 판검사나 변호사의 길을 추구하기보다 사회 정의와 노동, 인권, 민주화 등에 더 큰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고시 공부를 멀리하고 학생운동에 나선 배경이다.

그동안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정권이 여러 번 바뀌었지만, 그는 어느 정권과도 입신양명을 위해 타협한 적이 없다. 어떤 정권도 그에게는 사회 정의와 민주화, 복지국가를 실현하는 정권이 아니었다. 모든 정권이 비판과 투쟁의 대상이었다. 그가 '영원한 재야'라는 별칭을 얻은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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