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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칼날이다(문익환 목사)

polplaza 2021. 3. 13.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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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이 글은 장기표가 1988년 옥중에서 출간한 '해방의 논리와 자주사상'을 추천하는 문익환 목사(1994년 작고)의 '추천글'이다. 故문익환 목사(1918.6.1~1994.1.18)는 민주, 통일운동가로 활동하였으며, 1989년 '문익환 목사 방북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고 문익환 목사)


이건 그냥 글이 아니다. 글치고는 겨레의 몸부림과 아우성이 담겨 있는 글이다. 그러나 이건 그냥 몸부림이 아니다. 그냥 아우성이 아니다. 이건 명경지수(明鏡止水)로 맑은 양심의 몸부림이요 아우성이다. 그러나 이건 그냥 양심이 아니다. 이건 서릿발 날리는 푸른 양심이다. 아니, 그대로 칼날이다. 그러나 이건 그냥 칼날이 아니다. 靑龍刀 무거운 칼날의 무게를 싣고 바람을 가르며 내려찍는 칼날이다. 그러나 이건 칼몸-그것은 민중이다.

그냥 민중이 아니다. 한국의 민중, 억눌리고 짓밟혀도 땅 속으로 힘줄을 뻗으며 돌 같은 땅을 뚫고 돋아나는 한국의 잔디 같은 민중이다. 이 땅을, 이 역사를 숨이 턱에 닿아 살아온 민중의 한이다. 모든 억압을 물리치고 기어코 우리의 세상을 만들고야 말겠다는 뜨거운, 뜨거운 뜻이다. 그 뜻 속에서 번져 나오는 푸른 꿈이다.

이것은 한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역사의 무게다. 그런데 장기표라는 기막힌 젊은이는 이 무게를 견뎌낸다. 견딜 뿐 아니라. 20여년 길바닥을 헤매면서, 때로는 수배자의 몸으로 쫓기면서, 감옥을 제집처럼 드나들면서 이 쇳덩어리를 역사에 대고 갈아서 스스로 날이 된 것이다.

장기표는 온 몸으로 이 땅의 가난하고 고생하는 민중의 날이 되어 내려찍는다. 무엇을?

그것은 돈으로 푹푹 썩어 행정부의 시녀가 되어 버린 사법부다. 백성의 인권을 지켜야 할 사법부가 백성이 인권을 짓밟는 원흉이 되어 버린 사법부다.

사법부를 채찍인양 휘두르며 양심적인 애국자를, 민주인사와 노동자와 학생을 사형장으로 몰고 가는 독재자의 손목이다.

장기표는 60년대 70년대 80년대의 파란만장의 역사에 대고 간 날카로운 많은 칼 가운데서도 가장 무섭고 가장 날카로운 몇 안 되는 칼이다. 이 칼들이 멀지 않아 신나는 칼춤을 출 날이 올 걸 우리는 믿는다.

그러나 이건 그냥 믿음이 아니다. 그건 우리의 입김이요, 가슴의 고동이다. 역사의 문이 삐걱 열리는 소리요, 그 문으로 들어서는 발자국 소리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사랑의, 우리의 믿음의, 우리의 희망의 전부가 이 책에서 외치고 있다.


1988. 5. 12 무너미에서.



[출처] [해방의 논리와 자주사상]/[문익환 목사] 이건 칼날이다 - 추천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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