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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겪은 장기표(이소선)

polplaza 2021. 3. 9.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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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이 글은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2011년 작고)가 1988년 옥중에서 '해방의 논리와 자주사상'이라는 책을 출판하는 장기표를 축하하기 위해 쓴 글이다. 이소선 여사는 장기표를 '영원한 스승'으로 여길 정도로 그에게서 자신감과 용기를 얻었고, 또 그를 아끼고 사랑했다.

(2004년 장기표 사무실 개소식에 참석한 이소선 여사/출처: 장기표 블로그)


지금부터 어언 20년 전의 일이다. 압제와 폭압의 먹구름이 이 산하를 뒤덮고 있던 '70년 11월 중순, 추위가 사람의 가슴을 선득선득하게 몰아붙이던 늦가을이었다. 아들 태일이가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근로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며 귀중한 제 생명을 이 땅의 노동형제들에게 바친 직후였다. 아들 태일이의 시신을 성모병원에 옮겨놓고 정신을 똑바로 차릴 경황이 없었다.
바로 그때 여동생 남편이 찾아와서 병원 근처의 3·1다방에서 웬 낯선 청년이 찾아와서 날 보자고 하면서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검은 바바리를 걸친 스물 예닐곱쯤 되어 보이는 청년이었다. 그 청년은 자기 소개를 하면서 대학생이라고 했었는데, 나는 그 자리에서 "우리 태일이가 '나는 대학생 친구도 하나 없나'하면서 그토록 대학생 친구 갖기를 바랐었는데 이제 죽고나서 나타나느냐?"라고 하면서 그 청년을 나무랐다. 태일이가 평소에 간간이 이 에미에게 한 말이 환청처럼 들리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 다방에서 처음으로 만난 그 청년이 바로 장기표다. 그는 아직 대학생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어머님,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몸이 상하시면 안됩니다"라고 이 에미를 위로하면서 "장례식은 어떻게 하기로 하였습니까?"하고 묻기에 "태일이가 요구한 8개 사항이 관철되지 않으면 장례식을 하지 않을 작정이다"고 대답했더니 청년 장기표는 대단히 기뻐했다. 그리곤 우리 둘은 곧바로 가까워졌다. 바로 그 자리에서 이 모든 요구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학생들이 다 맡아서 장례식을 치를 테니 종이에 도장을 찍어달라고 해서 곧바로 도장을 찍어 주었다.

이 만남 이후 20여년 간의 길고도 짧은 만남의 시작이었다. 그 이후 기표는 우리 집으로 오기도 했고, 경찰이 쫓을 때에는 뒷산에서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어둑어둑해지면 산을 내려와 아이들(청계노조원)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었고, 이 에미에게도 노동법 등을 하나하나 알아듣도록 설명해 주었다.

어느 날 같이 공부를 하다가 라면을 먹을 때에도 한 마디라도 더 얘기 해주려고 하다가 결국 그 라면마저 다 먹지 못하고 새벽이 밝아오자 희뿌연 눈밭으로 훌쩍 떠나가곤 했다. 그럴 때면 이 에미 가슴 한 구석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처럼 허전했었다.

그러한 그와의 만남 속에서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고, 이 땅에서 이 에미가 해야될 일이 무엇인가를 하나하나 깨달아 가게 되었다.

'72년 10월 유신독재가 시작되었고, 독재자 박정희는 반대자들을 말살하기 위해 그 무시무시한 긴급조치를 발동하였다. 거리에는 온통 서슬퍼른 독재의 암흑이 짙게 깔리었다. 당시 기표는 민청학련 관련자로 수배되어 지금의 방학동에 피신해 있을 때였는데 그가 피신해 있던 바로 그 집 대문에 현상수배 벽보가 붙어 있었다.

그런데도 내가 가보면 그는 밖으로 나다니면서 활동을 했다. 이 에미가 마음이 조마조마하여 제발 좀 꼭꼭 숨어 있으라고 하면 그는 숨어 있으면서도 일을 해야한다면서 거리로 내달았다. 나는 그러한 그를 보면서 무한한 용기를 얻었고, 어떠한 피해가 오더라도 해야될 일을 하는 그에게서 한없는 격려를 받았다.

더욱이 그 시기에는 붙잡히면 곧장 사형이었고, 특진과 현상금에 눈깔이 뒤집힌 경찰들이 온 거리를 들쑤시고 떠돌아다니면서 "장기표, 이철....."하며 일일이 이름을 들먹이며 외치고 있을 때였으니 말이다.

그러한 그가 그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면 언제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하고 안타까워하였고 혹 다시는 못 볼까하여 절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불현듯 찾아와서 이 에미에게 살아가는 보람을 느끼게끔 했다.

그후 그는 붙잡혀 감옥에도 갔었고, 다시 풀려 나와 활동하다가 또 '80년에 수배를 받아 피신하기도 했다. 그런 뒤 1984년 초 수배가 해제되어 이 에미 가까이에 와서 살다가 '86년 5. 3 인천투쟁의 배후조종 혐의로 구속되어 7년형을 선고받아 지금은 공주교도소에서 2년째 옥살이를 하고 있다.

나는 지난 20여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고 같이 살기도 하고, 보기도 하였지만 하원이 아빠처럼 건전하고, 진실하고, 바르게 살려는 사람은 그가 처음이라고 생각한다.

'86년 2월 달에 하원이 엄마에게 그 무허가 집마저 팔자고 했다 길래 나는 우리 집 가까이에서 그가 떠나는 것을 아쉬워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자기가 사는 그 조그마한 보금자리마저 팔아서 어려운 민통련의 살림에 보태려고 했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정말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다시 한 번 나의 마음을 더욱 더 다잡아 매게 되었다.

그렇게 나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고, 같이 지냈던 나날들을 생각하면 그가 우리 모두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이고 필요한 사람인가를 더욱 절감케 된다.

지금 나에게 있어서 다른 무엇보다도 가슴 저 밑으로부터의 바램은 그를 바로 옆에서 보고 싶은 것이요, 비록 그렇게는 못한다 하더라도 그가 건강하게 지내는 것이, 그리하여 건강하게 가족과 우리와 함께 다시 만나는 것이 소원이고 희망이다. 그는 언제나 나에게는 영원한 스승이고, 그가 건강해야함은 그가 나와서 해야될 일이 많은 까닭이다.

내가 하원이 집에 들리는 날이면 하원이가 할머니가 오신다면서 운다. 그리고 감기에 걸려 내 품에 안겨들면서 울먹이는 보원이의 어깨를 껴안으면서, 이들에게 아니 우리 모두에게 그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가를 느낀다. 또한 이들을 갈라놓고 있는 자들에게 끓어오르는 노여움을 느낀다.

하루속히 그가 우리에게 돌아올 수 있는 해방의 날을 맞이하도록 노력해야겠다.

그가 감옥 안에서도 쉬지 않고 글을 써서 한 권의 책을 낸다기에 비록 그의 얼굴을 직접 보지는 못하지만 그립고 아쉬운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며 마음의 위로를 받으니 기쁘기 그지없다.


1988. 5. 20 쌍문동에서


[출처] [이소선] 내가 겪은 장기표| 해방의 논리와 자주사상 - 축하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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