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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해방을 위한 긴 여정-장기표(김정남)

polplaza 2021. 3. 9.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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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이 글은 김영삼 정부 때 대통령 교육문화수석비서관을 지낸 김정남 씨가 쓴 '이 사람을 보라2 - 인물로 보는 한국 민주화운동사(2017년)'에 나오는 장기표 관련 부분(인간해방을 위한 긴 여정-장기표)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전태일 평전'이 세상에 나오게 된 배경을 소상하게 적고 있다. 고 조영래 변호사가 전태일 평전을 집필하게 된 배경과 일본에서 첫 출간할 때 저자명을 '김영기(金英琪)'로 표기한 이유 등을 밝히고 있다. 

(김정남이 쓴 '이 사람을 보라2- 인물로 보는 한국 민주화운동사' 책 표지)



조영래는 1988년 10월 6일 자 <한겨레신문>에 쓴 칼럼, [장기표는 무슨 죄가 그리 많은가]에서 이렇게 썼다.

“양심수 전면 석방을 공약한 6.29 선언 이후 벌써 몇 차례나 석방조치가 있었는데도 그때마다 탈락되어 아직껏 철창신세를 져야 하는 그(장기표)는 대체 무슨 죄가 그리 많은가.…… 1967년 어느 겨울밤, 나는 동숭동 대학로를 끝없이 걷다 서다 하며 베트남 파병부대에 자원입대하겠다는 그를 온갖 말을 동원해 가며 만류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렸고, 나로서는 역사의 현장을 체험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다’고 하는 마지막 말로 나를 단념시키고 말았다. 그 역사의식이 그의 첫 번째 죄였다.……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지키라’고 절규하며 스물둘의 젊음을 스스로 불살라 죽었을 때, 장기표 씨는 누구보다도 먼저 성모병원 영안실로 달려가 그의 주검을 온몸으로 껴안았다. 그 이후 십수 년 그는 끝없이 되풀이되는 투옥과 도피 생활을 겪으면서도 언제나 고통받는 노동자들과 민중의 곁에 있었다. 배고픈 자와 함께 배를 곯았고, 아픈 자와 함께 앓았고, 통곡하는 자와 더불어 눈물을 흘렸고, 분노하는 자를 위해 외쳤다. 바로 그 사랑이 죄였다.…… 1972년의 유신체제 수립, 그리고 1980년 5공의 광주학살, 이런 무시무시한 일을 겪으며 사람들이 좌절과 침묵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 때에, 그는 오히려 군사독재 타도의 결의를 더욱 굳히고 불철주야로 민주화운동의 재건을 위해 뛰어다녔다. 깡마른 체구의 한 병약한 인간에 지나지 않으면서도 불의한 권력 앞에 무릎 꿇기를 거부하는 그 터무니없는 자존심, 유연한 타협을 모르는 그 지나친 강직함이 그의 죄였다. 장기표 씨가 어떤 사람이냐고 누가 내게 물을 때면 나는 한마디로 ‘그는 순수한 사람이다’라고 대답한다. 창랑(滄浪)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는 어부의 노래를 그는 알지 못한다. 세상이 다 취해도 홀로 깨어 있으려고 하는 그 지나친 순수함이 그의 병이요, 그의 죄이다.”

조영래야말로 누구보다 장기표를 잘 알고 있는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장기표라는 한 사람을 가장 그의 모습에 가깝게 그려 낸 글이 조영래의 이 칼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글에는 6.29 선언으로 민주화가 되었는데도, 이러저러한 구차한 이유가 붙여져 감옥에서 나오지 못하는 장기표를 안타까워하는 조영래의 심경이 알알이 담겨 있다. 이 글의 서두에서 조영래는 장기표와 처음 만났을 때를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장기표 씨와 내가 처음으로 만난 것은 1966년 가을, 그 무렵 어느 날 서울대학교 개교기념행사였던가 무언가로 효창운동장에서 교내 체육대회가 열렸는데 1,500m 달리기 시합에 장기표는 맨 꼴찌로 뒤쳐져서 남들이 다 골인한 뒤에도 만장의 박수와 폭소를 한 몸에 받으며 온전히 한 바퀴를 혼자서 마지막까지 달렸다. 행사가 끝나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내가 그에게 ‘실력도 안 되는 사람이 어째 출전할 생각을 했느냐’고 농담 삼아 물어보았더니 그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가을 하늘 아래서 한 번 마음껏, 달려보고 싶습디다.”

그래, 장기표는 그런 사람이다. 장기표라는 사람을 조영래가 그때 이미 이렇게 명징하게 그려 냈다는 것이 놀랍다. 조영래가 떠난 지도 벌써 20여 년이 지났고, 그동안 세상도 많이 변했다. 조영래가 미처 보지 못한 장기표의 그 이후의 행적도 우여와 곡절이 많았고, 그것을 보는 세상 사람의 눈이나 평(評)도 여러 가지다. 그러나 나는 조영래가 보았던 그것이 바로 지금도 여전히 장기표의 참모습이 아닌가 싶다. 장기표에 대한 이러저러한 세간의 시선과 평가는 장기표의 어느 일면, 어느 행적 하나를 자기의 처지에 비추어 멋대로 재단하고 포폄(褒貶)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장기표야말로 누구보다 열심히, 성실과 정성을 다해 살아왔고, 또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는 쉼 없이 공부하고, 생각하고, 고뇌하며, 사랑하며 살고 있다. 그는 이 나라 이 공동체가 지금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놓고 그 누구보다 절절하게 고뇌하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그보다 이 나라, 이 공동체를 사랑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고, 그처럼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놓고 고민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전태일과 맺어진 끈질긴 인연

장기표가 동대문 평화시장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70년 여름 서울대 법대생들과 함께 <자유의 종>이라는 신문을 만들면서부터였다. 제2호에 평화시장의 노동 문제에 관한 신문기사를 발췌, 정리해서 실은 것이 있었다. 장기표는 이때부터 평화시장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얼마 뒤인 11월 13일, 전태일 분신 사건이 터지자, 장기표는 그의 시신이 안치돼 있던 성모병원으로 달려갔다.

명동성당 앞 3.1 다방에서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를 만나 장기표는 “서울대 법대 학생인데, 아드님의 뜻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 찾아왔다고”고 말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태일이가 평소 자신에게도 대학생 친구가 한 명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고 그토록 말했는데, 그 아이가 죽고 나서야 찾아왔구나”하며 두 시간 넘게 전태일이 평화시장에서 한 일을 들려주었다. 점심을 굶는 어린 시다들에게 차비를 털어 풀빵을 사주고 자기는 걸어서 집에 오다가 통행금지에 걸려 파출소에 잡혀간 일, 근로기준법을 열심히 공부하면서 어머니에게도 그 내용을 가르치려 한 일, 시다를 돌보려다 공장에서 쫓겨난 일, 노동조합을 만들려다 평화시장에는 발도 붙이기 어렵게 된 일, 그리고 아들이 분신한 후 근로감독관이 취한 몰인정한 태도 등에 관해 폭포수같이 어머니는 열변을 토했다. 심지어 전태일을 낳기 전의 태몽까지도 들려주었다. 이 만남은 숙명적이었다. 과연 그 인연이 40년이 넘게 지속되어 왔으니 그것이 어찌 숙명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으랴.

장기표는 이소선 어머니로부터 이처럼 전태일의 삶과 사랑, 투쟁과 희생을 들으면서 “이 사람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해야겠다”고 간절한 마음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학교에 가서 몇몇 학생들에게 ‘전태일 분신 사건’을 설명하고, 마침 그날 약속이 되어 있던 조영래를 만났다. 조영래는 사법시험 공부를 중단하고 ‘전태일 투쟁’에 뛰어들었다. 이들은 11월 16일 오전 10시에 서울대 법대에서 학생총회를 열었다. 학생 100여 명이 모여, ‘민권수호학생연맹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전태일의 장례식을 ‘서울대 법대 학생장’으로 치를 것을 결의했다. 그러고는 30여 명이 성모병원 영안실로 찾아갔다. 학기말인데도 서울대 상대를 비롯한 각 대학과 기독단체들의 호응이 뒤따랐다. 언론도 전태일 사건을 적극 보도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전태일 사건은 국민적 관심사가 됐고, 지식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으며, 정치권에서도 이 사건을 정치쟁점화했다.

전태일의 죽음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집중되자 정부도 비소로 긴장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성모병원 영안실에 있던 학생들을 전원 연행하고 출입을 통제했다. 장례식을 하루빨리 치르기 위해 이소선 어머니를 온갖 방법으로 회유했다. 위로금으로 3천만 원을 주겠다고 했다. 어머니는 이러한 회유를 단호히 거부하고, 8개 항의 조건, 즉 ‘일요일은 쉬게 할 것’, ‘노동조합의 설립을 보장할 것’ 등을 요구했다. 정부는 다급한 나머지 이 모든 조건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전태일의 장례식은 이소선 어머니가 다니던 쌍문동의 창현교회에서 ‘한국노총장’으로 치러졌는데, 장례위원장은 최용수 한국노총위원장, 호상(護喪)은 이승택 노동청장이었다. 대규모 장례를 준비했던 학생들은, 11월 20일 서울대 법대에서 정문이 차단된 가운데, 이미 들어와 있던 서울대 법대, 서울대 문리대, 이화여대 학생 400여 명으로 추도식을 거행했다.

장기표는 1971년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으로 조영래, 이신범, 심재권과 함께 구속되었다가 항소심에서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의 형을 선고받아 1972년 12월에 석방되었다. 장기표는 전태일 분신 사건 당시에 보았던 전태일 전기를 써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우선 전태일이 남긴 수기와 일기를 어머니로부터 넘겨받아, 감리교신학대학의 포이트라스(한국 이름 박대인)의 도움으로 복사를 했다. 원본을 어머니에게 돌려준 뒤에도 계속 어머니를 만나 전태일의 어릴 적, 그리고 최근의 행적을 들었다. 이렇게 두 달 이상을 만났다. 오전에는 어머니를 만나 이야기를 듣고 오후에는 그것을 정리했다. 그렇게 정리한 것이 노트 3권 분량을 넘었다.

이것이 뒷날 조영래한테 넘겨져 [전태일 평전]이 된다. 당시 조영래와 장기표는 다 같이 민청학련 사건으로 쫓기는 몸이었다. 조영래는 장기표의 기록을 토대로, 더욱 세밀한 자료 수집을 거쳐 평전 집필에 착수했다. 수배 중임에도 틈틈이 장기표와 이소선 어머니, 그리고 청계피복노조 관계자들을 만나 빠지거나 의심나는 부분을 보충했다.

나는 공교롭게도 이 [전태일 평전]의 최초의 독자가 되었다. 조영래가 완성된 원고를 내게 가져와 그 출판을 부탁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쫓기고 있는 장기표, 조영래, 김근태를 돌보고 있는 처지였다. 국내에서의 출판은 엄두도 못 낼 형편이었다. 나는 그 원고를 일본 가톨릭 정의평화협의회에 보내 일본 쪽에서 출판이 가능한지 타진했다. 다행히 송영순(바오로) 선생이 출판사를 물색해, [불꽃이여 나를 태워라 - 어느 한국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일본어로 출판했다. 1978년의 일이었다. 그 책의 저자는 김영기(金英琪)로 되어 있는데, 이는 나와 조영래와 장기표의 이름자에서 한 글자씩을 따서 조영래가 지은 이름이었다. 일찍이 여공애사(女工哀史)를 겪었던 일본에서도 전태일의 죽음은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켜, 일본 시민운동 그룹의 관심이 높았다. 그리하여 이 책을 바탕으로 일본에서는 <어머니>라는 제목의 영화가 제작되어 시민운동단체에서 널리 상영되었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책과 영화 필름을 2009년 8월 17일, 전태일재단의 창단 개소식 때 당시 그 재단의 이사장 장기표에게 전달, 기증했다.

민주교육장이었던 재판정

장기표는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 조종자로 지명수배를 당했다. 그가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 조종자가 된 이유는 그가 동향 후배 김병곤에게 써 준 <민중의 소리>가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문건은 그해 4월 전국의 각 대학에서 동시다발로 대규모 시위를 계획하면서 발표된 것 중의 하나였다. 4.4조로 비교적 단조롭게 진행되기는 했지만 김지하의 담시 <오적>을 연상케 하는 측면도 있어 밖에서는 그것이 김지하의 작품이라는 소문도 나돌고 있었다. 김지하의 <오적>은 판소리의 형식과 가락에다가 문학 작품의 성격을 띠고 있는 데 비하여, <민중의 소리>는 선전‧선동의 냄새를 강하게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을 날카롭게 고발하고 풍자하고 선동하는 그 진정성이나 대중성이 대단한 작품으로, 4‧4‧4‧4자를 한 행(行)으로 하여 275행이나 되는 장문이었다. 그 처음과 끝은 이렇게 되어 있다.

“우리 호소 들어 보소 배고파서 못살겠소 / 유신이란 간판 걸고 국민대중 기만하여 / 민주헌법 압살 위에 유신 독재 확립하니 / 기본권은 간 곳 없고 생존마저 위태롭다 / (중략) / 우리 모두 궐기하여 유신 독재 타도하고 / 4월 혁명 정신 살려 민주민권 쟁취하자 / 나아가자 피 흘리자 민주혁명 이룩하자.”

수배 중에도 그는 부지런히 움직였는데, 한때는 부산 태종사에 내려가 중이 되기도 했다. 우상(우墒)이라는 법명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머리를 깎고 옷도 승복으로 갈아입고, 공양주 보살의 역할도 했다. 어느 때, 어느 일을 맡아도 성심성의를 다하는 것이 그의 성품이나, 그는 절집의 규율과 습속을 철저히 지켰다. 30여 쪽이나 되는 능엄신주는 물론 천수경까지 외워 독송했다. 중 생활을 시작한 지 한 달도 안 되어 선암사의 석암 스님을 계사로 하여 사미계도 받았다.

그러나 중노릇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한 데다, 결혼하고 아이 낳는 세상의 행복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 서울로 몸을 뺀 뒤에 다시는 돌아보지 않았다. 아마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가 내게 은신처를 부탁해 온 때가. 나는 처음에 전병용을 통해 그 형(전중용)네 집에 가 있게 했는데, 뒤에는 전중용의 처남댁으로 거처를 옮겼다. 처남은 노동자로 갓 결혼해 아이를 낳았는데, 대소변을 받아 낸 기저귀가 문 밖에 나오기만 하면, 장기표가 그걸 번개같이 빨아 빨랫줄에 걸어 놓는 통에, 오히려 그 젊은 부부가 장기표에게 미안해했다고 한다. 이렇게 그는 가는 곳마다 많은 아름다운 이야기를 뿌리며, 그런대로 도피생활을 잘 견뎌 냈다.

이 과정에서도 장기표는 이소선 어머니와 청계피복노조의 김혜숙, 이숙희, 민종덕 등도 자주 만났다. 중부시장의 어느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많은 글을 썼는데, 월간 잡지 <대화>에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어느 평화시장 노동자의 하루 생활을 수기 형식으로 쓴 글 [인간시장]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그는 1976년 7월 10일, 김승균 내외의 소개로 알게 된 지금의 아내 조무하와 결혼했다. 그때 신부는 고등학교 교사였기 때문에 짧지만 생활비 걱정 없이 꿈같은 결혼생활을 했다. 그러나 안정되고 행복했던 결혼생활은 1977년 2월 말, 중앙정보부에 장기표가 체포되는 바람에 끝나고 말았다. 민종덕과 전태삼을 만나러 다방에 갔다가 덜미를 잡힌 것이다.

3월 21일에 장기표는 긴급조치 9호, 반공법, 향토예비군설치법, 주민등록법 등을 위반한 혐의로 구속 기소되는데, <민중의 소리>가 공소사실 제1항이었다. <민중의 소리>는 긴급조치 9호가 발동하기 이전에 씌어졌기 때문에 긴급조치 9호로 걸지 못하고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했다는 반공법 위반으로 공소제기되었다. 뒤늦게 잡힌 장기표에게 그들이 갖다 붙일 수 있는 죄목은 죄다 갖다 붙였다. 재판이 시작되자 이소선 어머니를 비롯한 청계피복노조 관계자들이 법정을 꽉 메웠다. 그들은 소리치고 손뼉을 치며 장기표를 응원했다. 그중에서도 이소선 어머니는 아주 강력하게 재판부와 검찰의 부당한 주장과 진행에 항의했다. 검찰의 직접 신문 때는 야유를 보내거나 큰 목소리로 어필했다.

검사가 장기표 피고인에게 “청계조합원 임금인상 투쟁을 배후 조종해 사회혼란을 일으켰지요?” 하고 신문하니까, 이소선 어머니가 방청석에서 일어나 “한 달 죽도록 일해 3천 원 받는 근로자가 자신의 권리를 찾으려고 (장기표를) 찾아간 거야. 근로기준법을 가르쳐 준 것도 죄가 되냐?” 하고 소리치기도 했다. 재판정이 소란스러워지자 재판장은 법정질서를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이소선 어머니를 법정모욕죄로 구속했다. 이때 이소선 어머니를 구속한 변정수 판사는 김대중 정부 시절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위원장을 맡는 등 민주화운동의 원로인 양 행세했다.

장기표는 최후진술에서 한 시간 넘게 자신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철학을 논리정연하게 전개했고, 특히 노동 문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밝혔다. 이는 그가 그동안 집필했던, 그러나 아직 발표하지 않았던 [우리나라 근로자 실태와 노동운동의 방향]을 거의 그대로 발표한 것이었다. 따라서 장기표의 재판은 그 과정이, 특히 최후진술은 그 자체로 장엄한 민주화운동의 교육장이 되었다. 나는 1976년 12월에 있었던 반공법 위반 재판에서 김지하가 했던 최후진술과 더불어, 장기표의 이 최후진술을 긴급조치시대의 대표적인 최후진술로 꼽는다. 장기표는 이 사건으로 1심에서 5년형을 선고받아 1979년 10‧26 사태로 석방될 때까지 약 3년간 징역생활을 했다.

재소자 인권 투쟁

1971년 구속 때 장기표는 공범인 조영래, 심재권, 이신범과 함께 자신들에 대한 잘못된 공소를 취하할 것을 요구하면서 단식투쟁을 벌였다. 1977년 두 번째로 투옥된 장기표는 재소자의 인권 문제에 자연스럽게 주목하게 되었다. 상고이유서를 쓸 때도 공소사실과 관련해서는 조금만 쓰고, 재소자 인권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그뿐만 아니라 감옥 안에는 박석운, 이범영, 성종대 등이 모두 12사상에 수용되어 있어 의기투합하기가 쉬웠다. 이들은 우선 부식(副食)이 정량대로 나오지 않는 것을 알아내고는 두부의 정량을 문제 삼았다. “반쪽 두부 돌려주고, 온쪽 두부 찾아먹자”는 구호를 외치며 투쟁에 돌입했다. 교도소에서 구호를 크게 외치는 것을 ‘샤우팅’이라 하는데, 샤우팅 투쟁에는 일반 재소자들까지 참여해서 서울구치소가 떠나갈 듯했다.

이들은 결국 구치소 당국에 미운털이 박혀 전국 각 교도소로 분산 이감되었다. 장기표는 마산교도소를 거쳐 대구교소도 특사에 수용되었다. 대구교도소에는 마침 강기종, 최열, 김용석, 정화영, 서승 등이 수감되어 있었는데, 이들과 힘을 합쳐 재소자 처우개선을 요구하는 단식투쟁을 벌였다. 뒷날 서승은 오랜 감옥생활 끝에 출감해 [옥중 19년]이라는 회고록을 출간했는데, 거기서 장기표를 제갈공명에 비유했다. 구속자 가족들과 재야인사들에게 연락해 대구교도소로 항의 방문을 오게 하는 등 감옥 안의 투쟁을 ‘감옥 안과 밖의 투쟁’으로 확대하면서, 마침내 최후의 목표였던 철망 제거에 일대 진전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교도소 당국은 철망을 제거하는 대신 방과 방 사이의 벽 돌담을 30cm 정도 더 달겠다는 절충안을 제시했다. 이는 재소자 처우 개선 투쟁사에 기록될 만한 일이었다. 이러한 처우개선 투쟁은 이감을 거듭하면서도 계속되었다.

장기표의 재소자 처우개선 투쟁은 점차 교도관 처우개선운동으로 발전해 나간다. 교도관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아 정상적으로 근무할 수 없는 한 재소자도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 장기표의 생각이었다. 교도관의 낮은 급료도 문제였지만 열악한 근무환경과 근무조건이 더 큰 문제였다. 장기표는 근로기준법과 공무원 복무규정, 그리고 다른 직종 공무원들의 근무환경 등에 비추어 열악한 교도관들의 처우가 어떻게 개선되어야 하는지 세밀히 연구하고 관찰했으며, 자신의 견해를 글로써 교도당국에 건의한 일도 여러 번 있었다. 장기표의 이러한 성심과 노력이 이심전심으로 교도관들에게 전해져, 교도관들의 도움을 받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고, 또 그들과 친해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성실성을 바탕으로 한 친화력, 그것이 장기표의 특기라고 할 수 있다.

어디를 가도 장기표는 재소자들에게도 인기가 있었다. 대체로 일반 재소자들은 정치범들을 부러워하거나 외경의 마음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다 같이 푸른 옷을 입고 있지만, 정치범은 ‘사람’이고 자기들은 하찮은 ‘도둑놈’이요, ‘범죄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런 그들과 함께 그들을 위해 재소자 처우개선 투쟁을 하는 장기표에게 그들은 동지애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장기표의 이러한 투쟁은 4번의 투옥, 그러니까 모두 10년 가까운 수형생활을 하는 동안 언제나 전개되었다. 이러한 투쟁의 결과 각 교도소 단위별로 처우가 개선되다가 1990년부터 전국의 교도소에서 부분적으로 재소자 처우가 개선되더니, 1995년에는 삭발, 집필도구, 서신, 접견 등에서 혁명적으로 개선되었다. 지금은 텔레비전도 시청하고, 전화도 사용할 수 있어 교도소가 ‘도둑놈 사는 곳’이 아니라 ‘사람 사는 곳’이 되었다. 이렇게 재소자의 처우가 개선되기까지는 1970, 80년대 정치적 이유로 투옥된 사람들의 줄기찬 투쟁이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장기표의 집중적이고도 계획적이며 줄기찬 투쟁이 크게 밑받침되었다.

얼마 전 나는 여주교도소로 접견을 간 일이 있었는데, 화상전화와 바둑은 물론 시설이 갖춰진 체육관 같은 데서 운동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겨울에 꽁꽁 언 주전자 속의 얼음을 깨서 냉수마찰을 해야 했던 내 수형생활을 돌이켜 보며 금석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민주화운동의 교과서가 된 쪽지 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장기표는 성실한 데다 매우 다정다감한 사람이다. 그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읽고 썼으며, 밖과 교신했다. 특히 그는 그의 아내 조무하와 엄청나게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감옥 안에서 죄수는 한 달에 4번밖에 편지를 쓸 수가 없다. 그래서 장기표는 봉함엽서 한 장에 원고지 약 100매 분량의 편지를 쓰곤 했는데, 어떤 때는 130매 분량을 쓴 일도 있었다. 아내 조무하는 날마다 편지를 썼다. 하루에 두 통 쓴 날은 있어도 한 통도 쓰지 않은 날은 없었다.

감옥 안에 있으면서, 밖에서 온 편지를 받는 기쁨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장기표는 거의 매일 편지를 받았고, 연휴가 있을 때는 하루에 네댓 통을 받기도 했다. 1987년에 이 편지들을 묶어 [새벽노래]라는 이름의 책을 냈는데, 이는 김대중의 [옥중서선]에 비견되는 책으로, 전남민주주의청년연합(전청연) 같은 데서는 이 책을 청년학교 교재로 쓰기도 했다.

더욱이 그는 도둑장가 가듯이 아무도 모르게 다방에서 결혼식을 올리고는 잠깐 함께 살다가 곧바로 구속되어 3년간이나 감옥에 갇혀 있었으니 아내에 대한 연민이 매우 깊었다. 그들은 편지로 부부의 정을 나누면서 키워 갔다. 독재권력이 두 사람을 갈라놓는다 하더라도 그들의 하나 됨이 중단될 수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밖에서 잃은 것을 안에서 찾자는 자세로 부부의 하나 됨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때 장기표가 쓴 편지 한 구절을 소개하면 이렇다. “세상이 다 나를 칭송하더라도 당신이 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모든 칭송은 내게 헛된 것이며, 세상 사람이 다 당신에게 위로의 말을 할지라도 당신에 대한 내 사랑의 말 한마디에 어떻게 비길 수 있겠소?”

장기표는 감옥 안에서 언제나 필기도구를 비밀리에 소지하고 있었다. 합법적으로 글을 쓸 때는 정식으로 집필 허가와 집필 도구를 받아서 썼지만 그렇지 아니한 경우에도 장기표는 비밀리에, 혹은 마음씨 좋은 교도관의 양해를 받아 글을 썼다. 인천사태에 관련해서 이부영을 만나러 전병용의 집에 갔다가 붙잡혀 투옥되었을 때는 교도관의 도움으로 [사랑론]을 썼다. 그것이 비공식적인 루트로 아내 조무하에게 전해졌고, 이것이 1988년 [우리, 사랑이란 이름으로 만났을 때]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책이 나왔을 때도 장기표는 감옥에 있었다. 책의 제목이 그럴듯한 탓도 있었지만, 이 책은 운동권 젊은이들이 연인에게 선물하는 책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 책은 물론 사랑, 특히 부부사랑을 다루고 있으나 장기표의 정치철학도 담겨 있다. “정치는 사랑의 사회적 실현이자 사회적 실천이기에 정치는 사랑이다.”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재판을 거부하는 대신 [자술서]라는 형식으로 민주화운동의 정당성을 밝히는 글도 썼다. 원고지 1,500매 분량의 글이었다. 그런데 그만 이 글이 연기처럼 공중으로 증발하고 말았다. 구치소에서는 법원에 보냈다고 하고 법원에서는 받지 않았다고 했다. 이 자술서가 재판기록에 첨부됐다면, 그것을 복사해서 운동권에 배포할 작정이었다. 그 글이 없어져 버리자 장기표는 항소이유서를 쓰기 위해 항소를 했다. 원고지로 2,000매 분량이었다. 재판부에 제출할 3부 외에 1부를 더 작성했는데, 고생 끝에 이를 반출하는 데 성공해, 뒤에 책으로 만들어졌다.

문건은 교도소의 양해를 받아서 쓰고 또 정당한 루트로 반출하는 방법과, 비밀리에 글을 작성한 뒤 작전을 통해 외부로 내보내는 비합법적인 방식이 있다. 합법적으로 글을 쓸 때에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비밀리에 문건을 작성하려면 볼펜과 종이를 따로 구해야 했다. 장기표는 아내가 보낸 편지지를 이용해 종이 문제를 해결했다. 볼펜은 평소 사귀어 둔 교도관이나 소지(감옥 안에서 교도관의 일을 거드는 기결수)를 통해 볼펜심을 구한 뒤 양장본으로 된 두꺼운 책의 표지에 깊게 구멍을 파서 감추어 두었다가 썼다. 물론 이감을 갈 때도 그런 식으로 해서 가져갔다. 반출은 대부분 아내를 통해서 했다. 접견 때 기술적으로 전달하거나 교도관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아내는 그 문건들을 받자마자 타이핑했다. 1991년 한길사에서 펴낸 [장기표 저작집 - 사랑의 정치를 위한 나의 구상](전8권)은 이렇게 해서 출간되었다. 그 하나하나가 있는 힘을 다해 쓴 노작이요, 남몰래 숨어서 쓴 피와 땀, 그리고 눈물이 담긴 저작이었다.

여기에는 그가 살아온 삶에서 온축된 그 자신의 철학이 담겨 있다. 몸의 철학이 있고, 노동의 철학이 있고, 사랑의 철학이 있다. 사람의 몸도 우주의 한 부분이자 소우주인 만큼 우주의 섭리 내지 자연의 법칙대로 몸이 작동할 수 있게 해야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 몸의 철학이다. 노동의 철학은 자신의 활동이 자아실현의 과정이 되게 해서 보람과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며, 사랑의 철학은 나와 상대방의 관계가 사랑의 관계가 되게 해서 사랑이 주는 마음의 평화를 누려서 행복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몸의 철학은 인간의 의지와는 무관한 ‘존재의 철학’이고, 노동의 철학은 인간의 자유 의지와 관련한 ‘의지의 철학’이며, 사랑의 철학은 나와 상대방의 관계를 이루는 ‘관계의 철학’이다.

인간해방의 길을 찾아서

장기표는 1986년 5‧3 인천사태 주도 혐의로 구속되었을 때 약 3,000매 분량의 항소이유서를 썼다. 그는 “우리는 잘 살 수 있는가? 그렇다. 우리는 잘 살 수 있다는 희망과 확신을 갖게 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는 말로 시작해, 우리 모두가 자유와 평화와 복지를 누리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안을 이 글에서 밝히고 있다. 그의 인생 역정은 이러한 꿈과 확신을 이루기 위한 긴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온갖 고난과 시련을 겪었지만 고통과 좌절을 느끼기보다 보람과 기쁨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민주화운동과 정치활동의 목표를 인간해방이라고 말하는데, 민주화운동과 정치활동을 열심히 하다 보면 그 속에서 자아실현의 보람과 기쁨을 누리게 되기 때문이다. 일상의 보람과 기쁨을 넘어 신앙적 체험의 법열(法悅)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경험이고 철학이다. 그래서 그는 민주화운동과 정치활동의 자기 해방적 의의를 국민 대중에게 설명하기 위해 법정에서 사자후를 토하기도 했고, 많은 글을 쓰기도 했다. 민주화운동과 정치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결국 나라와 국민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오고, 사랑에 기초한 민주화운동과 정치활동은 자기 해방을 가져온다는 사랑의 정치철학을 주창해왔다.

어떤 의미에서 장기표는 사상가요, 경세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970년대와 80년 고비고비마다 운동론을 썼고, 시대의 징표를 누구보다 빨리 읽었다. 그 어려운 조건에서도 그렇게 많은 글을 썼고, 그렇게 쓴 글들은 하나같이 오랜 고난 속에서 깊은 사색 끝에 나왔다. 따라서 그가 행하는 법정진술이나 항소이유서, 그리고 쪽지 글로 나온 모든 글들은 정치적 메시지라기보다는 그 자신이 온몸으로 사색하고 고뇌한 것이기에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호소력을 담고 있다.

4번에 걸쳐 10년 가까운 세월을 감옥에서 보낸 이 나라의 대표적인 민주투사이지만, 그는 재심을 청구하거나, 명예회복과 보상을 신청하는 데 반대한다. 애당초 독재정권 아래서는 불법이 될 수밖에 없는 투쟁을 해 놓고서는 뒤늦게 합법성을 인정받겠다는 것은 자가당착이라는 주장이다. 그런데도 기어이 자신의 행위가 합법적이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행위가 민주화투쟁이 아니었거나 그 시대의 정권이 독재정권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니, 이것은 민주화운동의 대의에 어긋난다. 게다가 재심을 청구해 무죄가 된다면 그런 민주화투쟁은 무효라는 사실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더욱이 민주화투쟁으로 보상을 받는 것은 더 큰 문제라고 말한다. 민주화투쟁은 누가 시키거나 보상을 바라고 한 것이 아니라 피해를 각오하고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한 것인데, 왜 보상을 받아야 하느냐고 한다. 그 보상금은 과거 독재자들이 아니라 국민이 부담하기 때문에 더욱더 그렇다고 한다. 또한 명예회복을 신청하는 것은 민주화투쟁으로 명예가 훼손됐다는 이야기인데, 그 덕분에, 그걸 팔아서 대통령, 총리, 장관, 국회의원을 해 먹었으면서 무엇이 모자라 또 무슨 염치로 명예회복과 보상을 받느냐, 이래서야 어떻게 민주세력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좋아질 수 있겠느냐고 한탄한다.

이러한 장기표의 주장은 그의 염결(廉潔)한 성품을 잘 말해 준다. 민주화투쟁으로 겪은 고생으로 말하면 장기표만큼 고생한 사람도 드물다. 그의 일생 자체가 투쟁과 고난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의 이러한 주장과 처신은 민주화운동을 팔아먹거나 그것을 금과옥조로 내세우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고, 그런 세태에 경종을 울리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 장기표가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나는 오랜 옥바라지와 수발을 든 부인, 그리고 장기표 가족이 살고 있는 그 형편을 생각할 때, 그것이라도 받아서 부인의 그간의 헌신과 노고에 보답하고, 앞으로 그의 남은 노후라도 보장받았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그가 공주교도소에서 복역하던 1988년 9월, 올림픽 직전에 평민당의 김대중 총재가 그를 찾아 접견을 왔다. 이때 장기표는 직설적으로 김대중 총재를 향해 지난번(1987년) 대선 때 그가 주장했던 ‘4자 필승론’을 들어 면박을 주었다. “4자 필승론은 말도 되지 않는 궤변일 뿐만 아니라, 설사 4자 필승론으로 대통령이 된다 한들 그게 민주화일 수 있는가. 4‧26 총선에서 야당이 지역감정에 따라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로 쪼개진 것을 황금분할이라고 하던데, 망국적 지역감정에 기초해 제1야당 총재를 하는 것이 의미가 있느냐. 지역감정을 배격하는 뜻에서 평민당을 해체하든가 평민당 총재직을 사임하라”는 장기표의 말에 김대중 총재는 겸연쩍어했다고 한다.

이보다 앞서 장기표는 1987년 대선 때 김대중에게 [민주와 자주, 민중을 사랑하는 자만이 후보를 양보할 수 있다]는 제목으로 후보 양보를 촉구하는 편지를 썼다. 이 편지를 부인 조무하가 김대중의 집으로 찾아가 직접 전했더니 “장 동지는 교도소에 있어 바깥 사정을 잘 모른다”라고 말하면서, 후보를 양보할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김대중은 장기표가 출소한 뒤에 어떻게든 그를 자신의 세력권으로 끌어들이려 노력했지만, 장기표는 자신의 길을 걸었다. 오히려 정당활동이나 참여를 시기상조라며 반대했던 사람들은 뒤에 비판은 없고 지지만 있는 ‘비판적 지지’라는 명분으로 김대중을 따라갔다.

그 이후 장기표는 정치권에 독자적으로 진출해서 많은 실패를 거듭했다. 그를 오랫동안 지켜보았던 나는 그것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나는 오늘 이 나라, 이 공동체를 놓고, “우리는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놓고 장기표만큼 자기의 경륜과 철학에 바탕해서 자신의 언어로 말할 수 있는 정치인이 과연 있는지 의문스럽다. 장기표가 거의 유일한 사람이 아닐까 싶다. 그렇기 때문에 조순 같은 이도 장기표의 이러한 경륜을 높이 사고 있다. 또 나는 장기표만큼 이 나라 이 민족을 놓고 사랑하고 고뇌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는 진실로 온몸으로 이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고, 그것이 서 있어야 할 모습과 가야 할 방향을 놓고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고뇌한다. 편협한 민족주의에 빠지지 아니하고 어설픈 이데올로기 따위에 현혹되지 않는다. 오직 민주화를 향해서 상하의 시선을 가리고 오직 달려오기만 했던 맹목의 민주화 투사가 아니라, 우리가 가야 할 미래, 뻗어 나가야 할 세계에 대해서도 그만큼의 넓고 높은 안목을 갖춘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리고 그는 누구보다도 부지런하고 성실하다. 하루 한 시간인들 허투루 보내지 않는다. 자기 일은 그 자리에서 성심과 최선을 다하는 것이 장기표다.

장기표는 1970년대와 80년 학생운동, 더 나아가 민주화투쟁의 신화요 전설이었다. 그가 잡히지 않고 견뎌 낸 오랜 도피생활은 그를 신출귀몰하는 사람으로 비쳐지게 했고, 잡혀서 법정에서 행하는 도도한 진술은 그야말로 민주화의 장전이요 현하의 웅변이었다. 그런 그였지만 정치판에 뛰어들고부터 그에게는 불운이 따라다녔고 세상의 평판도 옛날 같지 않다.

나는 그가 정치를 포기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너무 안쓰럽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출판기념회이던가, 장기표가 주인공인 어느 모임에서 나는 “제발 장기표가 잘 되어 성공하는 것을 단 한 번만이라도 꼭 보고 싶다”고 내 절실한 속내를 고백한 일이 있다. 그러나 장기표는 “본래 나는 인간해방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민주화운동에 뛰어든 데다 정보문명 시대야말로 인간해방의 시대가 되리라고 확신하는 터라 인간해방을 실현할 정치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서, 자신은 이처럼 역사의 소명에 따라 정치를 하고 있으니 자신이 힘들다거나 가까운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 준다고 해서 정치를 포기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의 소명을 이렇게 정리해서 말했다. 제발 그의 소명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인간해방 이루라는 역사의 소명 따라
온갖 노력 다 했건만 아직도 못 이뤘네
아무리 어렵다 해도 마침내는 이루리.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비서관)



[출처] 이사람을 보라2 - 인물로 보는 한국 민주화운동사(김정남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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