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면신경마비 진단을 받은 지 3달이 다 돼간다.
그동안 병원에서 재활치료를 받고, 가끔 침 치료를 받았지만 회복 속도가 너무 더디다. 보는 것과 먹는 것, 말하는 것이 계속 불편하다. 특히 눈의 시력이 떨어져 사물이 흐릿하게 보여 답답하기 그지없다. 이런 현상이 거의 석 달 동안 지속돼 안경을 새로 맞춰야겠다는 생각을 수차 했다. 길 가다가 안경점이 보이면 바로 새 안경을 맞추고 싶었다.
그러다가 오늘, 마침 일요일이어서 단골 안경점을 찾아갔다. 서울 상도동에 있는 안경점이다. 원래는 아버지가 안경점을 운영했는데, 지금은 아들이 운영하고 있다. 아들은 대학도 안경 전문 학과에 들어가서 가업 승계할 준비를 일찌감치 했다고 한다.
점심 식사 후, 출발하기 전에 먼저 전화로 확인했다. 직원인지 며느리인지 알 수 없지만 젊은 여성이 받기에 "오늘 일요일인데 가게 문을 열었느냐"고 물었다. 여성은 "저녁 9시까지 가게를 연다"고 대답했다. "그럼, 가게로 가겠다"고 말하고선 전화를 끊었다.
아내가 동행할지 내게 물었다. 새 안경을 맞추면 안경테가 어울리는지 봐줄 수 있을 것 같아 좋다고 했다. 차가 별로 막히지 않아 약 25분쯤 걸린 것 같다. 이전에는 시장에 사람들이 제법 붐볐는데, 오늘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좀 의외였다. 아마도 휴가철이라서 그런지 모른다.
가게에 들어서자 부모는 안 보이고 아들이 보였다. 아들에게 "부모님은 안 나오셨냐? 잘 계시냐"고 했더니 "안부를 전하겠다"고 했다. 예전엔 좀 무뚝뚝해 보였는데, 말도 잘하고 친절했다. 안경점 주인으로서, 고객을 대하는 자세와 여유가 뿜어져 나왔다.
"눈이 침침해져서 새 안경을 맞추고 싶다"고 했더니 "검사를 하자"고 했다. 오른쪽 눈과 왼쪽 눈을 차례로 검사했다. 보이는 것이 흐릿해서 초점이 잘 잡히지 않았다.
주인 아들은 "눈이 많이 건조하다. 초점이 잘 잡히지 않으니 연말이나 새해에 다시 오시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안면신경마비가 와서 눈이 정상이 아니다"고 내 상태를 설명했다. "얼마나 됐냐"고 묻기에 "이제 3달 가까이 돼간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아들은 "신경마비가 다 나으면 그때 맞추면 좋겠다"고 했다. 내가 "안과 병원에서 내년 1, 2월 경에 진료를 보자고 예약해 놨다"고 하자, 그는 "그때 병원에서 문제가 없다고 하면 새로 초점 검사를 한 후 안경을 맞추자"고 제안했다. 나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보통 안경점이었다면 고객이 원하는 대로 그냥 안경을 맞춰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이 안경점 주인 아들은 초점 검사를 해 본 후, 다음에 하자며 새 안경 맞추어 주는 것을 연기했다. 그것도 무려 5~6개월 이후로. 당장 안경을 맞추려고 갔는데, 눈 회복 과정이 최종 끝난 후에 맞추자고 한 것이다.
아들은 내가 쓰고 간 안경의 코 받침대가 누렇게 색깔이 변색된 것을 보고 새 것으로 갈아주었다. 돈은 받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도 이 정도는 항상 무료로 서비스를 해 주었다. 작은 것 하나에 고객은 감동한다. 내가 이 가게를 안지 아마도 30년 가까이 되어 간다. 안경의 특성상 자주 갈 일은 아니어서 1~2년 만에 한 번씩 가게 된다.
아들은 고객 장부에서 나의 자료를 보면서 "2년 전에 오셨다"고 했다. 2년 만에 갔는데 고객을 기억하고 친절하게 맞아주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내가 길 가다가 쉽게 들어갈 수 있는 안경점을 마다하고, 약간의 번거로움과 시간을 투자해서 이 가게를 찾는 이유를 대변해 주는 듯하다. 서비스도 중요하지만, 기억은 더 소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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