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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의병장,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polplaza 2021. 4. 17.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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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安重根, 1879.9.2.~ 1910.3.26.)은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에서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대한제국의 항일 의병장 겸 정치 사상가이다. 2010년 2월 14일 일제의 1심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지 않았다. 1910년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순국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 되었다.

안 의사는 고려 후기의 유학자 안향의 26대손으로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1895년 아버지를 따라 천주교에 입교하여 토마스(Thomas, 도마, 다묵(多默))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아버지 안태훈(安泰勳)이 동학군을 진압하는 데 참여했다. 대한제국 말기 삼흥학교 설립과 남포 돈의학교 인수 등으로 교육운동을 전개하였고,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했다.

1909년 3월 단지회(일명 단지동맹)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으며, 동년 10월 우덕순 조도선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계획했다. 10월 26일 하얼빈역 앞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쏜 후, 러시아 헌병에게 현장에서 체포됐다. 이토는 급히 후송됐으나 사망했다.

안 의사는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조사와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의 재판 과정에서 ‘한국의병 참모중장’으로서 독립전쟁을 수행하면서 이토를 사살하였으므로 전쟁포로로 대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법정에서 이토의 죄상으로 명성황후 살해죄, 동양평화 교란죄, 1905년 한일협약 5개 조 강행 체결죄 등 15가지를 주장했다.

안 의사는 감옥에서 見利思義 見危授命 (견리사의 견위수명: 이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쳐라), 爲國獻身 軍人本分(위국헌신 군인본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다) 등 많은 붓글씨를 남겼다.
동북아 평화와 관련하여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집필하던 중 사형이 집행돼 원고를 완성하지 못했다. 서론만 있는 미완의 글이지만, 그동안 여러 연구를 통해 그의 동북아 정세에 대한 인식과 사상을 엿볼 수 있다. 한국 정부에서 안 의사의 유해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아직까지 찾지 못한 상태다.

서울 남산 중턱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있다(사진: 안중근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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