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상대가 나에게 강요할 때 그것을 극복하는 법

polplaza 2021. 12. 12.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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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생활을 하다보면 누군가가 나에게 뭔가를 강요할 때가 있다. 그것은 다양한 형태로 나를 괴롭힌다. 친구나 지인이거나, 상사이거나, 연인이거나, 부모이거나, 자식이거나, 비즈니스 상대이거나, 그 상대방은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다. 

강요라는 것은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강제로 요구하는 것이다. 요구하는 내용 또한 금전 등 단순히 재물이거나, 사업상 필요한 업무상 과제이거나, 심부름 같은 힘을 필요로 하는 육체적 노동이거나, 학문 연구와 같은 두뇌를 사용하는 정신적 노동이거나, 그 종류 또한 다양하다. 

어떤 형태이든 상대의 요구에 대응하는 방식은 일반적으로 2가지이다.

하나는 요구를 들어주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거부하는 방법이다. 문제는 요구를 들어주든가, 거부하든가 어떤 방식으로든 마음이 편치 않다는 점이다. 요구를 수용해준다면 내가 손해보는 것 같고, 굴복하는 것 같다. 때로는 인격과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다.

물론 상대가 내가 사랑하는 연인이거나, 내가 좋아하는 친구이거나, 내가 아끼는 자식이라면, 내가 존경하는 부모님이라면 그 요구를 들어줌으로써 조금이라도 도움을 준 것 같아 뒤끝 없이 오히려 흐뭇함을 느낄 수도 있다. 이런 관계에서는 거부하는 것이 오히려 내가 모자라 못해준 것 같아 미안하고 죄스럽게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상대가 친하지 않은 단순한 지인이거나, 업무상 관계된 회사의 상사이거나, 학문을 연구하는 연구자라면, 특히 어떤 일을 중심으로 엮인 업무적 관계의 사람이라면 강요 자체가 아주 애매해진다.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런 경우에는 대부분 거부하는 것이 낫다. 거부하는 것이 당장은 불편해도, 마음에 없는 일을 하는 것보다 백배 이상 낫다. 

살다보면, 가끔 마음씨 좋은 사람들을 보게 된다. 이 사람들은 남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한다. 상대가 누구든지 요구하는 일을 모두 수용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알고보면 기꺼이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수용하는 경우가 많다. 거절해야 하는 상황에서, 거절하지 못하고 상대의 요구를 수용하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결국은 탈을 낸다. 본인도 스트레스받고, 결국은 상대의 요구를 만족시켜주지 못한다.

예를 들어, 디자이너가 1주일 내에 상품 매뉴얼 디자인작업을 빠듯하게 마무리해야 하는데, 평소 잘 아는 지인이 급하다면서 유명 배우 캐리커처를 5일 안에 10개를 만들어 달라고 졸라대자 할 수 없이 수용하는 식이다. 평소대로 업무 방식대로 한다면 둘 중의 하나는 완성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지인의 강한 요구를 거절할 수 없어 캐리커처작업을 해주기로 했다. 이 디자이너는 휴식시간이나 수면시간을 줄이든가, 밤을 새든가 해야 한다.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을 자초한 것이다. 그러고도 디자인매뉴얼 작품을 1주일 내에 마무리 짓지 못하거나, 캐리커처의 완성도를 높이지 못해 결과적으로 자신의 명성과 신뢰를 떨어뜨리게 된다.

사람은 하루 24시간, 일주일 7일, 일년 365일을 쓸 수 있다. 먹고, 일하고, 쉬고, 잠자는 시간은 조금씩 달라도 총량적으로 주어진 시간은 똑같다. 

따라서 자신의 역량에 맞게 모든 일을 결정해야 한다. 거부하는 것을 두려워 해서는 안된다. 거부하는 것을 자연스러운 일로 체득하는 것이 좋다. 설령 좋은 일이라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누군가의 강요는 일반적으로 옳은 행동이 아니다. 그렇다고 반드시 틀렸다고 볼 수도 없다. 나에게 미래에 득이 될 수도 있는 강요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 내가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면 거부하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거부하는 것이 부자연스럽고, 거북하다면 용기를 내서 나를 다잡아야 한다. 단호하게 거부하기로 결심하되, 거부 의사를 밝힐 때의 말과 행동은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해야 한다. 상대가 불편하지 않게 말이다. 상대를 납득시킬 수 있는 이유를 댈 수 있으면 더 좋다.

그런데 자신의 생각에 갇힌 사람들의 요구를 거부할 때는 각오해야 할 게 있다. 그 상대와 인연이 끊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 올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에 갇히면 누구나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인정하기 어렵다.
예를 들면 동해안에서 자란 아이는 바다를 파란색으로 인지하는데, 서해 갯벌에서 자란 아이는 바다가 탁한 갈색이라고 여긴다. 세상을 본 것만큼 경험한 만큼만 아는 것이 자신의 생각이나 확신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동해서 자란 아이는 커서 서해를 가보고, 서해서 자란 아이는 동해를 가면 알게 된다. 바다는 여러 가지 색깔이 있구나, 심지어는 녹색으로 보이기도 하고, 포말은 흰색으로 보이고, 얕은 바다는 투명으로 보이기도 한다. 밤에는 아예 검은색으로 보인다.

지동설 같은 것도 같은 사례이다. 그 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것이다. 

개인의 자존심과 아집이 너무 세거나, 자신만의 생각에 갇힌 사람이라면 그를 이해하거나 설득하는 일이 매우 어렵다. 그럴 때는 3가지 선택을 할 수 있다. 하나는 내가 굴복하는 것(상대 의견을 따름)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상대가 내 의견을 따르게 함)이다. 나머지 하나는 결별(서로 남남으로 헤어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최악의 선택은 다른 사람의 강요에 몸으로  굴복하면서 마음으로는 수용하지 못하는 일이다. 이때는 몸과 마음이 이율배반적으로 작동하게 된다. 심리적으로 불안하고, 불만족스러운 상태가 지속되어 궁극적으로 건강을 해치게 된다. 만에 하나 강요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하는 선택을 하게된다면 몸과 마음이 동시에 그 선택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 군대에서 흔히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는 말이 있듯이, 몸과 마음을 하나로 일치시키는 것이 최악을 피하는 길이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거부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면, 과감하게 거부하는 것이 상책이다.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은 그런 류의 사람들은 미리 경계하고 거리를 두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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