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장기표,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것"

polplaza 2021. 12. 11.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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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 선생은 한국 민주화 운동의 대부로 불린다. 일부 언론에서는 '영원한 재야'라고 부르기도 한다.

1966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하여 30년의 세월이 지난 1995년 졸업했다. 그의 나이 50세에 대학 졸업장을 받은 것이다. 졸업에 필요한 전공과목과 학점을 모두 이수하는데 30년의 세월이 지났다. 권력의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성격을 지닌 그는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정상적인 대학생활을 할 수 없었다. 1967년 입대해 월남전 참전 등 3년간 군복무, 9년간 투옥, 12년간 수배생활을 단순 계산해도 24년을 '군인 장기표', '수배자 장기표', '재소자 장기표'로 보냈다. 그에게 학창시절은 순탄하지 않았다.

1970년 복학한 그 해 11월 15일은 그에게 역사적 날이었다. 서울 성모병원 앞 3.1 다방에서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1929~2011)를 만나 장례문제를 협의하는 등 본격적으로 노동운동, 노학연대의 시발점을 만들었다. 앞서 11월 13일 서울 평화시장 재단사 출신의 전태일(당시 22세)이 열악한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분신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전태일은 화염 속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절규했다. 서울 성모병원으로 옮겼으나, 그는 "내 죽음을 헛되게 하지마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이소선 여사를 만난 장기표는 서울대 법과대학 학생장으로 치르겠다고 제안해 이 여사의 동의를 받았다. 그러나 학생들이 개입하면서, 언론의 관심이 고조됐고, 이에 정권도 민감하게 대응했다. 정부는 이소선 여사가 요구한 일요일은 쉬게 할 것, 노동조합 설립 보장 등 8개항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결국 전태일 열사의 장례식은 사망한지 6일 만인 11월 19일 서울 쌍문동 창현교회에서 '한국노총장'으로 치러졌다. 이승택 노동청장(현 노동부장관 격)이 호상을 맡고, 최용수 한국노총위원장이 장례위원장을 맡아 사실상 '관제 장례식'으로 급하게 마무리됐다.

이 바람에 서울대 법과대학 학생장을 준비하던 장기표의 계획은 차질을 빚었다. 이소선 여사에게 '시신 인수증'까지 받아두었던 학생들은 정부와 전격 합의로 장례식까지 마친 이소선 여사에게 따질 형편이 아니었다. 이에 학생들은 11월 20일 서울대 법과대학에서 서울 소재 대학생들과 연합으로 '전태일 선생 추도회'로 대체하기로 했다. 이마저 기동경찰이 서울대 법과대학 정문에서 출입을 통제해 이미 들어와있던 법과대학, 문리대학, 이화여대 학생 400여명으로 추도회를 진행했다.

그로부터 이소선 여사가 사망하기까지 약 50년간 장기표 선생은 이 여사에게 노동운동, 민주화운동의 동지이자 정신적 지주로서 서로를 믿고 지지했다.

장기표 선생은 일생을 민주화 운동에 바쳤음에도 "나는 민주화 운동을 한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민주화 보상금을 신청하면 10억원 상당의 큰 금액을 받을 수 있음에도 "나는 돈으로 보상받기 위해 민주화운동을 한 것이 아니다"며 보상금 신청 자체를 거부했다. 부인 조무하 여사는 어느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보상금 신청문제에 대해 "쪽 팔린다"고 대답했을 정도로, 더욱 완고하다. 흔히 말하는 부창부수(夫唱婦隨: 남편이 주장하고 아내가 따름)가 아니라, '부창부수(婦唱夫隨: 아내가 주장하고 남편이 따름)'라 불러야할지 모를 정도다.

그런데, 장기표 선생은 2021년 12월 11일(토) 오후 다수의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내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일이 있다"고 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됐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는 "내가요, 젊었을 때 가정교사를 너무 오래 한 것이 가장 후회가 된다"고 했다. 의외였다.

장 선생은 고향인 김해 진영의 한얼고등학교에서 마산공업고등학교로 전학간 고2 때부터 가정교사를 했다고 한다. 가난 때문에 스스로 벌어서 학교를 다녀야 했다. 수입은 좋은 편이었다고 했다. 마산공고를 졸업할 당시 서울대 법대에 지원했다가 낙방해 동국대 법대에 진학했다. 가정교사를 하면서 생활비와 학비를 벌었다. 1966년 서울대 법과대학에 재도전해 합격한 이후에도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가정교사를 해야 했다.

장 선생은 "요즘 젊은이들을 보면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들이 많더라"면서 "젊었을 때 공부도 하고, 하고 싶은 것들을 해야 하는데 아르바이트하면서 소중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 생각해보니, 내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게 가정교사를 너무 오래 했다는 것"이라고 평소 듣지 못했던 얘기를 꺼내 놓았다.

불과 1년 전 쯤만해도, "나는 학생운동 하고 민주화운동 하고 수배 당하고 감옥살이 하고 그러다보니 회사에 취직해서 돈을 벌어본 적이 없다. 그러나 가정교사를 해서 강사로 유명해지고 돈도 많이 받았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 한 적이 있다. 그 때는 후회한다는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르바이트와 가정교사의 차이는 직업의 종류에 대한 범위에 차이가 있다. 아르바이트는 포괄적이고, 가정교사는 특정 분야를 지칭한다. 아르바이트 속에 가정교사도 포함된다.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옛말이 있다. 사람에 따라서, 시기에 따라서, 나이에 따라서 생각이나 관점이 달라질 수 있다. 세상 이치란 것이 영원히 불변하는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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