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지난 5월 8일 숙환으로 별세한 이한동(87) 전 국무총리가 11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그동안 건국대학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는 여야 정치인과 언론인, 지인 등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 평소 고인이 주변에 베풀었던 덕과 정이 남달랐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한동 전 총리는 1934년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나 경복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1981년 제11대 총선에서 처음 국회에 입성한 뒤, 6선 국회의원으로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노태우 정권인 1988년 내무부 장관, DJP(김대중 DJ, 김종필 JP의 영문 이니셜을 합친 것) 연합정권으로 탄생한 김대중 정권에서 2000년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정권 등 4대 정권에 걸쳐 여권에 몸 담으며 요직을 지냈다. 1992년 대선을 앞두고 YS 편에 서서 당내 경선과 대선 승리에 기여했다. YS(김영삼) 이후, DJ(김대중) 이후 각각 대선을 노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정치권에서는 '한또' 또는 '일도(一刀)'로 회자됐으며, '폭탄주'로도 유명했다. 폭탄주의 대명사는 박희태 전 국회의장, 한국일보 편집국장 출신의 고 심명보 의원 등이 있다.
그는 고성 이씨의 후예임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틈만 나면 자랑을 해서 그를 몇 번 만난 사람들은 그가 고성 이 씨임을 대부분 기억한다. 서울법대 졸업 후 사법시험에 응시한 그는 합격자 발표가 나기 전에 군에 입대하는 바람에 2등병 복무 중 최종 합격하는 희귀 사례를 만들었다. 그 바람에 이등병에서 중위로 계급이 수직 상승하여, 병장이 아닌 대위로 전역했다.
서울지방법원 판사, 변호사, 서울지검 부장검사 등을 지낸 그는 검사 재직 중 1981년 청와대 측의 제안을 받고 정계에 입문했다. 1987년 6월 항쟁과 직선제 개헌, 5공청산과 5공 청문회, 전두환 전 대통령의 국회 증언, 3당 통합(민주자유당 출범)과 당내 대선후보 경선, DJP 연합 등 격동의 시기를 헤쳐 나왔다. 여당 원내 총무 시절에는 여야 대치정국을 대화와 타협으로 풀어나가는 원칙과 능력을 보였다는 평을 받았다. '화합과 통합의 정치', '정적이 없다', '큰 정치' 등의 수식어가 그에게 따라붙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한자성어 가운데 '海不讓水(해불양수, 바다는 물을 가리지 않는다.)'라는 말을 좋아했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사이버정치마당 > 정치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명희 의원, 대법원 앞 1인 시위 (0) | 2021.06.24 |
---|---|
‘마사지’ 없는 ‘마사지센터’ 왜곡 보도사건.. 법정 소송은? (0) | 2021.05.15 |
24년 전 허경영 대선후보 공약 보니 이낙연 전 대표 공약(?) 있네 (0) | 2021.05.07 |
한겨레민주당과 창당준비위원회 창당발기인 김부겸 (0) | 2021.05.07 |
김종민 변호사, 이재명 지사의 '재산비례벌금제' 비판 (0) | 2021.05.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