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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승, "감옥의 제갈공명, 장기표"

polplaza 2021. 8. 5.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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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재일교포 학생으로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으로 유학와 서울대에서 석사(사회학과) 학위를 딴 후, 풍운의 꿈을 꾸던 젊은이가 있었다. 1945년생 서승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대학원 졸업의 기쁨은 잠시였다.

1971년 4월 육군보안사 사람들에게 붙잡혀가 견디기 힘든 고문을 당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며 수사관들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난로의 경유를 온몸에 뿌려 분신 자살을 시도했다. 자신의 살을 태우는 통증은 너무 컸다. 그는 고통의 단말마를 내질렀다. 비명 소리에 놀란 수사관들이 달려와서 불을 껐다. 그는 목숨을 건졌지만, 본래의 얼굴을 되찾을 수 없었다. 심한 화상으로 청년의 얼굴을 잃어버렸다.

그는 '재일교포학생 학원침투 간첩단사건'을 일으킨 혐의로 1심에서 사형, 2심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90년 2월 28일 3.1절 특사로 풀려날 때까지 19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낙담하여 남은 삶을 체념했을것이다. 그러나 그는 출옥 후, 1994년 7월 일어판 '옥중 19년'을 출간했다. 1999년 2월에는 역사비평사를 통해 한글판 '옥중 19년'을 발간했다. 19년 동안 한국의 감옥에서 보고 듣고 겪었던 사건과 경험을 담아냈다. 국가권력의 폭력과 인권침해의 실상을 폭로함으로써, 무소불위의 국가권력에 경종을 울렸다.
2019년 6월 27일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G20 정상회담 참석차 일본을 방문, 서교수를 초청한 재일교포 만찬간담회에서 '존경하는 서승 교수님'이라고 불러 논란을 샀다. 비전향장기수 출신에게 '존경한다'는 수식어를 붙였기 때문이다. 남북 대치상황에서, 정치이념은 아직도 우리 시대의 벽으로 존재하고 있다.

앞서 서 교수는 2011년 6월 25일 '진실의힘' 재단이 수여하는 '제1회 인권상'을 수상했다.
이듬해 2회 인권상은 고(故) 김근태, 인재근 부부가 수상했다. 진실의힘은 과거 군사독재정권 시절 고문을 받아 간첩으로 조작된 피해자들이 진상규명을 위해 인권활동가, 변호사, 의사 등과 뜻을 모아 설립한 재단법인이다. 재심을 통해 무죄와 손해배상금을 받은 피해자들이 배상금 중 일부를 갹출해 출연금 조성에 힘을 보탰다.

(서승 교수의 '옥중 19년'의 일본어판(왼쪽)과 한국어판 표지)


이 논란의 인물, 서승 교수가 장기표 선생을 거명했다. 여기서는 서 교수의 정치적 이념과 사상문제를 초월하여, 그가 본 장기표는 어떤 인물이었던가를 알아본다. 서 교수는 '옥중 19년' 수기에서 장기표 선생을 '감옥의 제갈공명'이라고 칭송했다. 그가 왜 장기표 선생을 감옥의 제갈공명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는지는 '옥중 19년'에 나타나 있다.

"그는 지모지략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제갈공명이 오장원에서 작전을 지휘하며 진주의 소송에서부터 병사들의 먹을거리에 이르기까지 세심히 배려하고 그 때문에 과로사한 것처럼, 그도 자기 건강은 돌보지 않고 주위 사람들을 세심히 배려했다."

(장기표 선생을 '감옥의 제갈공명'으로 평가한 서승 교수의 '옥중 19년'에 나오는 본문 캡처)



"반유신투쟁에서 지도적 역할을 담당했는데, '도주 3인방' 중 한 사람이었던 그는 체포를 피해 장기간 지하에서 운동을 지도했다. 대구교도소로 이송되어왔을 때 그는 나와 동갑인 서른세 살이었는데 이미 민주화투쟁의 거목이었다."

"몸이 약했던 그는 옥중에서 냉수마찰과 좌선, 요가로 정진하며 독서에 힘썼다. 어느 날, 그가 식사를 하지 않기에 방을 들여다보았다. 눈을 감고 좌선을 틀고 있었다. 여든 살 노모의 부음을 들었다며 담담하게 말했다. 막내아들을 옥중에 둔 채 세상을 떠난 노모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리고 또 그는 얼마나 슬펐을까? 자기의 슬픔에는 담담하고 남의 고통에는 깊이 배려해 처신하는 그였다."

"장기표씨가 1사동 하층 사람들에게 잊지 못할 선물을 가져다주었는데, 밥을 4등급에서 3등급으로 올려준 것이었다. 그에게는 매일같이 큼지막한 차입보따리가 들어왔는데 그는 돈 없는 정치범들과 일반수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었다."

서승 교수가 대구교도소에서 동갑내기 장기표 선생을 처음 만나, 보고 들은 이야기를 쓴 것이다. 특히 장 선생이 재소자들의 식단을 4등식에서 3등식으로 올리는데, 교도소에 말 몇마디로 약속을 받아낸 걸 보고 놀랐다고 했다.

서 교수는 "그 이후 1988년 가다밥이 폐지될 때까지 우리들은 3등식을 끝까지 지켜냈다. 이것으로 옥중의 굶주림에서 기본적으로 해방됐다"고 했다.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장기표 선생은 재소자 인권뿐만 아니라 교도관 처우개선까지 신경썼다. 서 교수는 "그는 또한 재소자의 처우개선을 요구할 때 반드시 교도관의 처우개선도 같이 꺼냈다"고 밝혔다. '1일 8시간 3부제 근무', '무보수인 비번 근무 해소' 등은 교도관들의 절실한 요구였지만, 그들이 행동하지 못하는 것을 장기표 선생이 공개적으로 요구했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서야 장기표씨의 제안이 실현됐다"고 서 교수는 전했다.

서 교수가 장기표 선생을 특별하게 본 것은 세상을 보는 통찰력이 일반 정치범들과 달랐기 때문이다.
"'교도관의 처우가 개선되지 않는 한 재소자의 처우가 개선되지 않으며, 재소자가 인간적인 처우를 받으려면 교도관도 인간적으로 처우받아야 한다'는 것이 장기표 씨의 주장이었다"는 것이다. "간수를 적으로 여기던 일부 노정치범들과는 다른 관점이었다"고 서 교수는 회고했다.

서 교수는 "교도관들도 분단조국의 고통을 나누고 있는 한 겨레"라며 "그들의 고통과 비애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감옥의 민주화와 수형자의 인간적 감옥살이는 바랄 수 없다"고 장기표 선생의 인식에 공감을 표시했다. 재소자들의 인권과 처우 개선을 위해서는 교도관들의 인권과 처우개선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재소자와 교도관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권익을 찾지 못할 때 장기표 선생이 옥중에서 이들을 위해 투쟁한 일은 당시로선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다.

서승 교수가 자신의 '잃어버린 19년'을 기록한 '옥중 19년'에서 장기표 선생을 '감옥의 제갈공명'이라고 부른 이유를 충분히 알만 하다하겠다.

('옥중 19년' 의 책 내용 중에서)

(장기표 선생의 이야기를 담은 '옥중 19년' 내용)

(교도관들의 애환을 소개한 '옥중 19년' 내용)


한편 서승(일본명 福田勝) 교수는, '옥중 19년'의 출판사(역사비평사)에 따르면, 1945년 일본 교토(京都)에서 태어나 도쿄교육대학을 졸업했다. 한국으로 유학와 서울대학교에서 석사 학위(사회학과)를 받았다. 1971년 육군보안사령부에 연행된 그는 ‘재일교포 학생 학원침투 간첩단사건’으로 1심에서 사형, 2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90년 2월 석방될 때까지 19년간 비전향정치범으로 옥고를 치렀다. 캘리포니아대학(버클리) 사회학과 객원연구원을 거쳐 1998년 리츠메이칸대학(立命館大学)의 법학과 교수가 됐다. 현재는 한국 우석대학교 동아시아평화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장기표의 수감 중 인권투쟁과 모친상, 그리고 3대 철학)

(세상을 바꿔야 한다-장기표의 민주화투쟁 영상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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