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추석, 시골 다녀오다

polplaza 2021. 9. 24.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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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추석도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재미가 없었다. 코로나19 때문이다.

지난해는 혼자 시골에 다녀놨는데, 올해는 동행하는 가족이 한명 있었다. 아들이다.

18개월 복무를 마치고 이달 초 전역했다. 시골 할머니에게 인사차 같이 가자고 했더니 기꺼이 따라 나섰다.

지난 일요일(19일) 오후 집에서 출발해 밤에 시골에 도착했다. 동생이 새로 지은 집이 어둠 속에서 덩그렇게 서 있었다. 마당과 주변 정리가 안돼 다소 어수선해보였다. 어머니가 반겨주셨다. 어린 조카들은 새집에서 잘 뛰놀고 있었다.

평소 안 하던 운전을 오래해서인지, 피곤해서 잠을 좀 설쳤다.

작은 추석(추석 전날) 날, 떡을 하러 면 소재지로 나갔다. 늘 가던 떡방앗간에 가려고 길가에 차를 세우고, 불린쌀(찹쌀 한되, 멧쌀 한되를 섞은 2되)을 담은 바구니를 들었다. 방앗간 골목 입구에서 젊은 친구가 "떡 하러 오셨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우리 집은 이제 떡을 안 한다"며 "고춧가루와 기름만 한다"고 했다. 아마도 떡집 아저씨 내외의 아들 같았다.

결국, 생전 처음으로 다른 떡집을 찾아갔다. 2되를 제사용 시루떡으로 주문하는데 3만원이라고 했다. 시간은 30분 정도 걸린다고 했다.

떡을 찾으면서 재난지원금으로 계산을 하려는데, 떡방앗간 사장님이 "한장은 만원으로 바꿔주면 좋겠다"고 간절하게 호소하듯이 요청했다. 재난지원금 1만원짜리 상품권 3장을 받아든 사장님이 한장은 현금 만원으로 바꿔달라고 해서 의아했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재료를 부산에 가서 사오는데, 상품권이 부산에서는 소용이 없다고 했다. 또 상품권을 저축하거나 현금으로 바꾸기도 힘들다고 했다.

이유는 사업자등록증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 가게는 전통 가내공업으로 인정받아, 따로 사업자를 내지 않았다고 했다. 이처럼, 사업자등록증이 없는 가내공업자나 노점상 등은 상품권이 귀찮은 존재라는 것이다.

떡집 사장님의 아내는 상품권을 전혀 안받을 수도 없는 처지여서, 현금과 반씩 받는다고 했다. 현금을 바꾸는 절차가 귀찮아서 아예 안받는 가게도 있다고 했다. 튀김과 파전 등은 사촌 동생의 제수 씨 두명이 오전에 와서 제수 씨를 도와주었다.

떡을 해온 나는 오후에 제삿상에 올릴 생선을 찌는 일을 했다. 늘 해오던 일이지만 이번에는 예전의 무쇠솥이 아니었다. 집을 짓는 바람에 솥을 적당한 곳에 새로 거취해야 했다. 마당 앞에 벽돌로 아궁이를 만들고, 그 위해 백솥을 씻어와서 올렸다. 불쏘시개를 대문 밖에서 구하고, 뗄감으로 굴러다니는 나무를 모았다. 불을 잘 지피고, 불길도 적당하게 조절했다. 그런데 탈이 났다.

백솥이다보니, 어머니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빨리 솥이 데워졌다. 솥 두껑을 열어봤더니 안에 물이 쫄아 없어지고 여러 마리 생선 중 한두 마리는 꼬리가 일부 타버렸다. 가장 값을 하는 돔도 꼬리가 타고 살이 받침 그릇에 붙어서 껍질이 떨어졌다. 제삿상에 그대로 올릴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돔을 구하러 다시 면소재지로 나갔다. 농협이 운영하는 하나로마트에는 생선 자체가 동이 난 상태였다. 다른 곳에 갔더니 마침 반건조된 냉동된 돔이 있었다. 국내산이라는 표시가 붙어있었다. 2마리를 사서 시골로 들어왔다. 어머니는 한마리 정도는 가스불로 하면 된다고 하셨다.

코로나 시국이라, 여기저기 다닐 수 없었다. 집에서 일을 거들어주거나, 장보러간 일이 전부였다. 오후 늦게 회성동 삼촌이 오셨다. 동네 뒤에 작은 집을 지어, 그곳에 계신다고 했다. 추석날 가족이 다 모일 수 없어서 하루 전에 오셨다고 했다. 산소 이야기, 집안 이야기, 사촌, 재종 이야기 등을 하시다 가셨다.

나는 컨디션이 점차 안좋더니, 추석날 아침에는 더 안좋았다. 밤새 뒤척였다. 몸살기운이 왔다. 아마도 특히 정체가 심해지는 명절 때 장거리 운전을 하면서 평소보다 신경을 많이 썼기 때문인 듯했다. 아내와 같이 다닐 때는 교대 운전을 하면서, 잠시라도 쉴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온전히 혼자서 운전한 탓이 컷던 것 같았다. 추석 아침에, 내가 몸이 안좋다고 했더니 남동생이 체온계를 가져와서 들이밀었다. 체온을 재보자고 보챘다. 내가 코로나 환자가 되면, 어린 조카들과 나이드신 어머니 등 모두 난리가 날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체온은 높게 나타나지 않았다.

차례를 지내고, 아침을 먹자마자 귀경하기로 했다. 실은 성묘를 가야하는데, 비가 쏟아져서 갈 형편이 아니었다. 평소 같으면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려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컨디션이 안좋은 것은 너무 확실했다. 어머니는 "몸이 안좋으면 한숨 자고 가라"고 하셨지만, 적극적으로 말리시지 않았다. 성묘를 가지 못해 아쉬움이 남았지만, 만에 하나 코로나 감염 전조일 수도 있고 해서 시골집을 떠나기로 했다.

오전 11시경 시골을 나섰다. 내가 코로나에 감염됐다면, 좁은 차안에서 같이 동행하는 아들은 십중팔구 감염될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라는 것이 반드시 내게 온다는 보장은 없다. 고속도로에 올라서자, 갑자기 졸음이 쏟아졌다. 전날 감기몸살 기운데 잠을 못잔 탓이었다. 휴게소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다시 출발했다. 최근 몇년 동안 이날만큼 고속도로 정체현상이 너무 길다고 느끼긴 처음이었다.

추석 연휴가 주중에 끝나기 때문인 듯, 차가 너무 몰렸던 하루였다.

저녁에 어머니가 전화를 주셨다. 몸은 괜찮냐고, 어디 쯤 가고 있느냐고?

밤 11시 쯤 시골에 전화를 드렸다. 늦은 시각이었지만 걱정하실 것 같아 잘 도착했다고 말씀 드렸다.

오랜 시간 동안 아무런 불평 없이 나와 동행해준 아들에게는 속으로 '고맙다, 아들아' 하고 독백했다.
코로나19 시국에, 사람들이 힘든만큼 고유 명절도 예전같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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