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정치마당

임진강변 화석정(花石亭)

polplaza 2021. 10. 8. 23:33
반응형

임진강변의 벼랑 위에 자리잡은 화석정(花石亭)은 경기도유형문화재 제61호다. 경기도 파주군 파평면 화석정로 152-72(율골리)에 위치해 있다. 현재 '花石亭' 현판은 병오년(1966년) 4월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썼다. 현판에 뚜렷하게 적혀있다.

(화석정 현판에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이름과 병오 사월이 한자로 적혀있다)


율곡 이이 선생이 8세 때 이곳 정자에서 '팔세부시(八歲賦詩)'를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율곡 이이 선생이 8세 때 지었다는 '8세부시'가 적힌 현판)

(율곡 이이 선생의 '8세부시'를 돌에 새겨 한글 번역을 붙여 놓은 기념비)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로 몽진을 가면서 심야에 임진강을 건널 때, 이 정자를 태워 불을 환히 밝혔다는 이야기는 널리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이후 80여년간 빈터로 남겨져 있다가, 1673년 헌종 때 이이의 증손들이 복원했다고 한다. 그러나, 1950년 6.25 전쟁을 겪으면서 소실됐다.

(화석정 옆에 우뚝 선 수령 270년 된 향나무)


현재의 정자는 파주시 유림들이 앞장서서 1966년 복원하기에 이르렀다. 박정희 대통령의 현판 글씨는 이 때 쓴 것으로 짐작된다. 이어 1973년 정부의 율곡 선생 및 신사임당 유적 정화사업 정책에 따라 정자에 단청을 하고 주위를 단장했다.

(화석정 단청)

(화석정 주변 전경)


파주시청에서 화석정에 대해 소개한 글이 있어 아래에 옮긴다.

-   아        래  -

율곡리 임진강가 벼랑 위에 자리 잡은 조선시대 양식의 정자로 정면 3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 겹처마의 초익공(初翼工) 형태이다. 정자에 서면 바로 밑을 흐르는 임진강을 굽어볼 수 있고, 난간에 기대어 보면 서울의 삼각산과 개성의 오관산이 아득하게 보인다.
이 곳 화석정 자리는 고려 말 대유학자인 길재(吉再)의 유지(遺址)였던 자리라고 전해지나 확인할 수는 없다. 세종 25년(1443) 율곡 이이(李珥)의 5대 조부인 강평공(康平公) 이명신(李明晨)이 세운 것을 성종9년(1478) 율곡의 증조부 이의석(李宜碩)이 보수하고 몽암(夢庵) 이숙함이 화석정이라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정자에 대한 기록에 의하면 당나라 때 재상 이덕유(李德裕)의 별장인 평천장(平泉莊:경치가 매우 아름다웠다 함)의 기문(記文) 중에 보이는 “花石”을 따서 정자 이름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 후 이이(李珥)가 다시 중수하여 여가가 날 때마다 이곳을 찾았고 관직을 물러난 후에는 이곳에서 제자들과 시와 학문을 논하며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당시 그의 학문에 반한 중국의 칙사(勅使) 황홍헌(黃洪憲)이 이곳을 찾아와 시를 읊고 자연을 즐겼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또한 왜구의 침공에 대비해 10만양병설을 주장한 이이의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은 선조가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난 가던 중 한밤중에 강을 건널 때 이 정자를 태워 불을 밝혔다는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그후 80여 년간 빈터만 남아 있다가 1673년(현종 14)에 이이의 증손인 이후지(李厚址)·이후방(李厚坊)이 복원하였으나 1950년 6·25전쟁 때 다시 소실되었다.
현재의 정자는 1966년 경기도 파주시 유림들이 다시 복원하고 1973년 정부가 실시한 율곡 선생 및 신사임당 유적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단청되고 주위도 정화되었다. 건물의 정면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花石亭” 현판이 걸려 있고 내부에는 이이가 8세 때 화석정에서 지었다는 <팔세부시(八歲賦詩)>가 걸려 있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