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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전 연변에서 본 북한(상)-조선족의 현주소

polplaza 2021. 12. 4.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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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이 글은 필자가 35년 전인 1996년 8월 국회 '통일대비 의원연구모임'의 방중 일정에 동행하여 취재한 내용을 당시 부산매일신문이 보도한 전문이다. 당시 신문 스크랩을 찾아 블로그에 전재할 수 있게 됐다.>>

서울 유행 한달이면 상륙 여성패션 점차 화려·대담

('연변에서 본 북한 시리즈(상)' 기획기사 캡처)


○--- 광복 51주년을 맞는 기쁨은 한편으로 민족 분단 51주년이라는 아픔을 동반한다. 8월 15일의 역사성은 36년간에 걸친 日帝치하로부터 해방이라는 민족적 쾌거와 분단이라는 또 다른 좌절감을 우리에게 한꺼번에 던져 주었다. 국회 30~40대 초·재선 의원들로 구성된 '통일대비 의원연구모임(회장 朴鍾雄 의원)'은 광복 51주년을 게기로 지난 2일부터 4박5일간 중국 延邊자치구의 조선족 지도자들과 중국 고위인사들을 잇달아 접촉하는 등 통일문제에 대한 현실적 접근을 시도하였다. 이번 중국 방문에 동행한 本社 기자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국내 통일 논의에 참고할 만한 내용을 3차례에 걸쳐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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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 조선족 자치구의 지도급 인사들은 우리 방문단에 우호적이었다. 그들은 중국 국적을 갖고 있는데다 그동안 북한과의 교류가 많았을 것임에도 우리 방문단을 기쁘게 맞아주었다. 이같은 모습은 커다란 변화로 받아들여졌다.
지난 2일 연변 대우호텔에서 만난 조선족 상징 인물인 연변大 부총장 鄭判龍 교수(65)의 말은 그동안의 변화를 단적으로 실감케 했다.
鄭 교수는 "연변은 지난 85년부터 남한과 왕래의 물꼬가 트였는데 88년(서울올림픽 개최 연도)부터 왕래가 잦아졌으며, 특히 92년 韓·中수교 이후 본격적인 왕래가 이뤄지고 있다"면서 "불과 10년만에 수십년 공산당을 한 사람들이 서울 사람들과 친해지는 것을 보면 확실히 피는 물보다 진한 것 같다"고 그간의 소감을 피력했다.
鄭 교수는 "왕래가 있기 전에 우리는 한국 사람들이 깡패인 줄 알았으나 만나보니 사람이더라는 생각을 갖게 됐으며, 이제는 확 끌어안는 단계가 됐다"고 설명하고 "지금은 서울 문화가 한달이면 이곳으로 온다"고 급속한 문화 파급현상을 가감없이 소개했다.
연변에는 한국판 가라오케가 성업중이고 이곳의 여종업원들은 서울서 최근 유행하는 노래까지 상당히 잘 부르는 수준이었다. 길거리의 여성들이 화려한 원피스나 짧은 스커트를 입은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정판용 연변대 부총장(왼쪽)과 김학철 옹)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회원으로 활동 중인 金學鐵옹(81)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해방직후 서울에서도 1년간 공산당 활동을 했다는 金옹은 "내 나이 81세까지 독립운동과 통일운동을 해서 얻은 결론"이라고 전제하면서 "조선반도 통일은 이북정권이 붕괴돼야 가능하다"고 역설한 것이다. 더욱이 그는 왼쪽 다리가 없음에도 쟁쟁한 목소리로 노익장을 과시해 우리 일행을 한번 더 놀라게 했다.
元山생인 金옹은 지난 41년 항일독립군인 조선의용군 일원으로서 일본군과 태항산 전투 중 왼쪽 다리에 총상을 입고 일본군 포로가 돼 나가사키 형무소로 압송당했는데, 치료를 받지 못해 결국 왼쪽 다리를 잘라냈다고 한다. 그는 해방직후 서울서 공산당 활동을 하다 월북, 평양에서 노동신문 기자를 했고 52년 연변 자치주에 정착해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정치소설 '20세기의 신화' 필화사건으로 중국에서도 10년간 감옥살이를 한 파란만장한 산역사의 증인이다. 국내에 그의 자서전 '최후의 분대장' 등이 출간돼 있다.
吳長淑 연변자치주 인민대표회의 의장과 鄭英泰 연길시장 등은 "연변이 빨리 발전하려면 한국의 선진 기술이 많이 들어와야 한다"고 강조하고, "우리 입장은 이곳에 한국 기업이 돈을 많이 벌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하는 일"이라고 한국 기업 유치에 적극성을 보였다.
이들에 따르면 지난해까지 연변에 진출한 우리 기업수는 대우 쌍방울 현대 기아 등 600 여개사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은 사회주의 경제체제로 인해 한국 기업들이 제도적 제약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안다면서 제도 개선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조선족이 가장 많이 산다는 연길시를 비롯한 연변의 생활 수준은 한국의 60년대 중반에서 70년대 초반 지방 중·소도시 수준으로 비쳐졌다. 소달구지와 인력거가 자주 눈에 띄었고, 시내를달리는 자동차는 대부분 10년 이상된 중고차가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중국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조선족의 생활수준과 교육수준이 가장 높을 것이라고 이곳 사람들은 전했다. 이곳에서는 상호를 한글과 한자로 병행하되 한글을 먼저 표기하고 있었다. 조선말이 상용어여서 우리 일행에게는 이곳이 낯설지 않았다.

(1996년 8월 연변 공항 모습)

(1996년 8월 연변 도로 모습)


서울과 왕래를 많이 하고 있다는 연길시 대외경제 무역국에 근무하고 있는 朴京植씨(42)는 "연변에 교포 1세대는 많이 생존해 있지 않다"면서 "그분들이 중공군(中共軍)에 편입돼 싸웠던 6.25 전쟁도 벌써 반세기 가까이 지나고 있어 남한에 대한 반감이 그 때만큼 깊지 않다"고 소개했다. 그는 "2세대, 3세대 연변 조선족들은 남과 북에 친인척을 남겨두고 있기 때문에 남북이 다 잘 됐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박씨는 연변 조선족들의 북한 방문 방법에 대해 "북한에 사는 친인척의 초청장이나 편지가 있을 경우에만 북한 방문이 허용된다"고 사적인 북한 방문이 제한적임을 밝혔다. 반면 공적인 방문은 제약이 없다고 했다.
박씨는 최근 연변과 남한의 교류가 급증하면서 남한 사람들로 인해 연변 교포들이 피해를 보는 사례가 있다며 특히 연변과 관련된 한국 언 론보도의 자제를 당부하기도 했다. 예컨대 연변 조선족과 북한 주민간의 밀거래를 한국 언론이 보도함으로써 밀거래가 끊기게 됐고, 당사자들이 공안 당국에서 조사를 받았다는 것이다. 조선족이 우리와 같은 핏줄이긴 하지만 그들은 현실적으로 중국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냉엄한 현실을 남한이 알아달라는 얘기였다.
우리 일행의 안내를 맡은 연변대 출신의 李모양(24)이 "때로는 애국심과 민족심 사이에 갈등을 겪을 때가 있다"고 토로했을 때는 '연변 조선족이 진정 우리의 살붙이구나'하는 안타까움과 조국을 놓아두고 중국 국적으로 살아가는 그들의 설움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李양은 "지난번 美애틀랜타 올림픽 축구 아시아 선발전에서 한국과 중국이 맞붙었을 때 중국을 응원해야 할 지, 한국을 응원해야할 지 망설이다 교대로 응원을 했다"고 말했다.
李양은 그 경기에서 한국이 3대0으로 중국을 이긴후 북경(北京)에서 택시를 탔더니 한족(漢族) 택시기사가 "한국이 중국을 이겨 조선족은 기본이 좋겠다"고 묻기에 "우리나라(중국)가 졌는데 뭐가 좋겠어요"라고 대답했다며 "그 때는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잖아요"라고 우리 일행에게 친근감을 다시 한번 보였다.<延邊=沈平輔기자>



(1996년 8월 15일(목) 부산매일신문 9면 캡처)



[사이버정치마당/정치이야기] - 35년전 연변에서 본 북한(중)-중국의 對한반도觀

35년전 연변에서 본 북한(중)-중국의 對한반도觀

"짧은 訪中기간이었지만 중국의 무한한 잠재력을 느낀다" "우리가 중국의 발전에 대비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은 언젠가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에서 독보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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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정치마당/정치이야기] - 35년전 연변에서 본 북한(하)-남북관계의 앞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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