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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서울의 봄 '서울역 회군'.. "서울대 주류운동권이 진실 왜곡했다"

polplaza 2023. 1. 18.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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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1980년 5월 15일 서울역에서 벌어진 대규모 대학생 시위대를 해산시킨 '서울역 회군'을 놓고 운동권 내부에서 책임자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당시 숭전대(현 숭실대) 총학생회장으로 학생회장단 모임을 주도했던 윤여연(68) 씨는 "운동권의 주류세력이 서울역 회군에 대해 진실을 왜곡하고 있다"면서 "잘못 알려진 내용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했다.

윤 씨는 최근 사석에서 "80년 5월 이른바 '서울역 회군'은 서울대 주류운동권이 결정한 것"이라며 "열리지도 않았던 학생회장단 모임 결정 운운하면서 그동안 서울역 회군의 책임을 (학생회장단에) 전가해온 서울대 운동권의 비양심적인 행태는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서울역 회군을 결정한 인사들 중에서 총리가 3명(이수성 서울대 학생처장, 이해찬 서울대 복학생협의회장, 김부겸 서울대 복학생협의회 총무) 나왔다"며 "서울대 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을 했던 유시민은 장관과 국회의원을 지냈다"고 비판했다.

"서울역 회군.. 학생회장단 회의서 결정한 것이 아니라 서울대 주류운동권이 결정"

윤 씨는 앞서 2022년 5월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5·18 기념 학술토론회'에서 '민주화의 봄의 학생운동'이란 주제로 발제자로 나서 "5월봉기 결정은 학생회장단 모임이 결정했지만, 서울역 회군은 서울대 운동세력의 독단적인 결정이었다"고 주장했다.

윤 씨는 "당시의 서울대 주류 운동세력과 DJ세력 등 정치권은 5.18항쟁 42주년이 된 지금까지도 서울역 회군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그동안 엄청난 삶의 굴절을 겪으며 희생해온 학생회장들에게 회군의 책임을 전가하는 잘못을 범했다"면서 "서울대 운동권은 복잡한 중층구조를 갖고 있어서 회군과 같은 중요한 의사결정을 심재철 홀로 결정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심재철 개인에게 역사적 책임을 전가하고 있는 무책임한 행태도 반성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대우빌딩 회의에 참여한 서울대 운동권의 양심선언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해찬 유시민 김부겸 등 서울대 주류 운동권과 DJ(김대중) 계열의 정치권이 '서울역 회군'의 책임을 학생회장단의 결정인 것처럼 왜곡하고, 서울대 총학생회장 심재철 개인에게 묻는 것은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기회주의적인 역사 왜곡이라는 주장이다.

운동권에서 '서울역 회군'의 책임 논란이 일고 있는 배경에는 만일 그 때 서울역 회군이 없었더라면 뒤이어 터진 광주 5.18의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김부겸 전 총리는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2020년 5월 16일 SNS에 올린 '1980년 봄'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광주의 비극은 서울역 회군에서 시작되었다. 서울의 봄을 무산시킨 저는 그래서 부끄럽다"고 했다. 서울역 회군이 광주 비극의 단초가 됐다는 인식이다. 김 전 총리는 이 글에서 "15일 오후 늦게 서울역 앞 학생회장단 회의가 열리던 미니버스 주변에서 저는 해산을 반대하는 입장을 설득하고 다녔다"고 '학생회장단 회의'를 기정사실화하면서 '서울역 회군'에는 반대했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반면 심재철 전 국회부의장은 2019년 6월 1일자 보도자료에서 "계엄사가 '김대중을 체포했다'고 발표하자, 그것을 듣고 광주시민들이 다음날인 18일에 대대적인 저항을 한 것"이라며 '광주민주화운동'은 '서울역 회군'의 결과물이 아니라 계엄사의 DJ체포 발표의 결과물이라는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심재철 전 부의장은 서울대 회군이 학생회장단의 회의에서 내린 결정이라고 밝힌 바 았다.

(윤여연 씨)

한편 윤 씨는 광주제일고를 나와 1974년 숭전대에 입학했다.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그는 80년대 운동권의 중심에 섰다. 주변 환경이 그럴만 했다. 장기표 이부영 김근태 등 2세대 운동권을 이어받은, 특히 김근태와 가까웠던 3세대 운동권이었다. 함석헌, 계훈제, 백기완 씨 등이 1세대로 분류된다. 94년에서야 졸업장을 받았다.

1980년 4월 9일 숭전대 총학생회장에 선출된 윤여연 씨는 당일 고교 후배인 심재철 서울대 총학생회장에게 학생대표자회의를 만들 것을 제의했다. 그날 저녁 신촌 중국집 청원에서 윤여연, 심재철(77학번), 안숙(77학번) 이화여대 총학생회장이 모임을 갖고 시국에 공동대응키로 했다. 다음날 10일에는 형난옥(78학번) 숙대 총학생회장이 합류했다. 4월 12일경 윤여연의 동향인 광주고 출신이자 동갑인 신계륜(74학번) 고대 총학생회장이 동참했다. 14일 모임에는 박광호 연대 총학생회장과 박성혁 서강대 총학생회장이 참여했다. 4월 16일 저녁 서울대, 숭전대, 이대, 숙대, 고대, 연대, 서강대, 외대, 성대, 중앙대, 홍익대, 건대, 동국대, 성신여대, 서울여대 등 서울 소재 대학 총학생회장들이 모여 학원민주화투쟁과 불투명한 시국에 대해 1차 대국민 성명을 발표키로 의견을 모았다. 4월 17일, 연대 학생회관에서 박광호 총학생회장이 '비상계엄해제, 정부주도 개헌반대, 언론자유 보장' 등의 내용이 담긴 대국민 성명을 발표했다. 5월 14, 15일 서울역에서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기까지 이처럼 단계적인 총학생회 결집 움직임이 있었다.

아래는 윤여연 씨가 2022년 5월 26일 '5·18 기념 학술토론회'에서 '민주화의 봄의 학생운동'이란 주제로 발표한 내용의 전문이다.

(2022년 5월 26일 열린 '5.18 기념 학술토론회' 포스터)


- 아 래 -

'민주화의 봄'의 학생운동 (윤여연/1980년 숭전대학교 총학생회장, 대동인쇄소 대표)

1. 민주화의 봄 전후의 시대상황

가. 국제정세

2차대전 이후 동서냉전을 유지하던 미국을 앞세운 다국적 자본은 베트남전 패배로 세계질서 붕괴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었으며, 신제국주의적 세계경영이 중대한 도전을 받고 있었습니다. 특히 한반도정세의 현상유지는 동북아질서의 가늠자가 되어 미국의 자존심이 걸려 있는 지역으로 직접개입의 가능성이 열려 있었습니다. 또한 군부통치가 계속되는 제3세계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었던 카터의 인권을 앞세운 외교정책은 미국내부에서 강한 도전을 받고 있었고, 군수산업을 주축으로 하는 제국주의적 다국적 자본은 레이건과 CIA 등을 앞세워 미국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하는 보수주의 회귀움직임을 강화하고 있었습니다.

나. 국내정세

1)정치정세

4.19민주혁명에 위기감을 느낀 친일매국세력과 연대하여 5.16군사쿠테타를 성공시킨 박정희는 반공이념을 앞세워 민중의 비판과 저항을 잠재우면서 1971년 삼선개헌과 대통령 당선으로 장기집권의 토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여 민중에게 분단극복의 환상을 심어주면서 유신헌법을 제정하여 영구집권을 획책하였습니다. 그러나 유신헌법제정으로 종신집권을 꿈꾸면서, 거듭된 긴급조치 발동 등으로 국민의 기본권을 제약하고 비판세력을 탄압하며 철권통치를 하던 박정희체제가 1979년에 들어서면서 급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1979년 8월 10일경 가발수출업체 YH노동자들이 폐업철회를 요구하며 신민당사 농성을 시작했고, 이를 해산하기 위해서 야당당사에 난입한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인해, YH노동자 김경숙양이 추락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에 국민들의 반정부여론이 커졌으며, 김영삼총재가 선명야당을 내세우며 항의농성을 시작했습니다. 과잉충성 강경파가 주도하던 다수집권여당 공화당은 야당을 무력화시키고자, “미국이 박정희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해 달라”고 언급한 YS의 뉴욕타임지 기자회견을 문제삼아 1979년 10월 4일 YS를 국회의원직에서 제명했습니다. 이에 항의하며 10월 13일 66명의 신민당 국회의원 전원이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했으며, YS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 마산에서 1979년 10월 16일에서 20일까지 학생과 시민들의 격렬한 가두투쟁이 이어졌습니다. 당황한 집권층은 격렬한 반정부투쟁이었던 부마항쟁의 진압과 정국운영 방안을 둘러싸고 권력내부의 강온파의 갈등이 폭발했으며, 10.26으로 이어져 박정희대통령이 사망한 것입니다.

2)경제사회정세

정부 주도의 근대화 추진과 경제개발계획 집행은 경제 각 부분의 불균형발전을 수반한 왜곡과 대외종속성을 심화시켰으며 관료 중심적 경제구조를 정착시켰습니다. 이러한 “선성장 · 후분배”를 앞세운 실적위주 개발독재의 후유증으로 경제발전의 성과가 소수에게 집중되어 빈부격차 등 불평등을 확대시키고, 분배에서 소외된 다수민중의 처지를 기아선상의 암담한 처지로 내몰았습니다. 특히 저농산물 가격정책과 거듭된 흉년으로 농민들의 저항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이주한 이주민들은 도시빈민을 형성하여 광주대단지 항쟁 등 사회불안 요인으로 잠재되었습니다. 더하여 월남특수로 형성된 외화는 소수재벌에게 집중되어 이를 바탕으로 정부주도 하에 노동집약적 경공업구조에서 중공업 중심의 산업구조로 재편되었고, 정부의 경제정책 지원에서 소외된 경공업산업 사업주들이 폐업과 임금체불을 일삼았습니다. 경공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이러한 생활 · 고용불안정은 물론 상대적인 저임금 · 장시간 노동에 저항하면서, 콘트롤데이타 · 동일방직 · YH무역 분쟁 등 곳곳에서 노동자, 민중의 투쟁이 계속되었습니다.

2. 그리고 1980년 민주화의 봄

가. 사회심리적 조건

1975년 베트남의 통일은 분단극복의 기대감을 높였으며, 1977년 미국 39대 대통령에 취임한 카터대통령의 인권과 평화를 앞세운 도덕적 인권외교는, 대한민국을 둘러싼 국제환경이 신군부에게는 불리하고, 반정부세력에게는 우호적으로 보이도록 만들었습니다. 국내환경도 권위주의 통치의 장기화로 억압과 차별, 불의가 일상화된 숨막히는 사회였기 때문에, 군사독재체제의 인적 · 물적 · 제도적 청산을 완성해서 자유롭고 평등하며 정의로운 정치 · 경제 제도와 구조를 만들어, 인간해방의 평등세상을 앞당기자는 외침이 전국적 · 전계층적으로 분출될 조건이 마련된 것입니다. 이러한 시기에 유신헌법 제정과 거듭된 긴급조치 발령과 탄압 등으로 국민의 기본권을 제약하고 철권통치를 하던 박정희대통령이 1979년 10월 26일 권력내부의 암투과정에서 사망한 것입니다. 이에 대다수 상식있는 국민들은 군인들에 의한 권위주의 통치가 끝나고, 국민들이 주인이 되는 “민주화의 봄”이 올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나. 미국의 움직임

10.26으로 박정희가 사망하자 카터 미국대통령은 10월 27일 NSC(국가안전보장회의)를 소집하고 주한미군의 "3호방위태세"를 발령했습니다. 10월 28일에는 공중경보통제기 2대를 한반도에 급파하여 한반도상황을 관리하면서, 10월 30일~11월 2일까지 미7함대 소속의 키티호크 항공모함울 포함한 4척의 전투함을 진해와 인천에 기항시켜 만일의 돌발상황에 대비했습니다. 미국은 초기 한반도정세를 안정시켜 미국의 국익을 보호하고자 외교관료 출신인 최규하를 중심으로 한 과도통치를 지원하다가 민중의 저항이 예상외로 거세지고 한반도에서 미국의 국익이 위협받는 상황이 오자 전두환 등 신군부를 지원하는 정책으로 급속하게 선회하였습니다. 특히 학생시위가 격화되자 항공모함을 파견하는 등 직간접적으로 신군부를 지원하다가 광주민중항쟁 시기에는 미국의 지휘권 하에 있는 군부대의 동원을 사후 승인하는 등 반인륜적 정책을 집행하여 수많은 양민이 학살당하는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다. 정치권의 움직임

야당인 신민당총재 YS는 자신의 제명결정에 항의하는 부마항쟁이 원인행위가 되어 10.26이 일어났다고 자신의 공을 과장하고 있었으며, DJ에게 신민당에 입당하여 상임고문직을 맡으라고 요구했습니다. 반면 DJ는 1971년 야당 대통령후보였던 자신의 50%지분을 주장하면서, 1980년 4월 7일 신당창당 구상을 밝히는 등 야당의 주도권잡기 경쟁으로 분열된 모습을 보였고, 신군부와의 대치전선을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한편 부패혐의로 미국에 체류중이던 이후락이 갑자기 귀국하여 집권정치세력이었던 공화당에서 1980년 3월중순 정풍운동을 제기했는데, 물밑거래가 있었던 탓인지 정풍운동의 결과 공화당의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로 거론되던 김종필이 공화당내에서 힘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라. 사회운동의 대응

유신헌법에 의한 정치일정 진행을 반대하는 재야인사 500여명과 학생들(서울대 이신범, 고대 조성우, 연대 홍성엽, 중앙대 이명준, 이석표, 한양대 이우회, 최열 등)은 1979년 11월 24일 YWCA에서 결혼식을 위장한 “대통령의 통대선출 저지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유신헌법에 의한 정치일정 중단과 유신헌법 철폐, 계엄해제, 거국내각 구성 등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계엄군의 무력진압으로 대회장소는 쑥대밭이 되었고 많은 민주인사들과 학생들이 보안사에 연행되어, 야만적인 고문 등 국가폭력 피해를 당했습니다. 이후 1980년 2월 29일 DJ의 복권과 더불어 민주통일국민연합을 만들고 신당창당을 위해 노력하다 5.18계엄확대 조치 이후 김대중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었습니다.

마. 군부를 중심으로 한 기득권 세력의 움직임

1) 10.26에서 12.12까지

철권통치자 박정희가 사망한 10.26 비상상황으로, 10월 27일 새벽 2시에 비상국무회의가 소집되어, 대통령 유고에 의해 국무총리 최규하가 대통령권한대행이 되었으며, 제주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리고 계엄사령관에 정승화육군참모총장이 임명되고, 노재현국방장관과 관계가 좋은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계엄공고 5호에 의해 10.26사건을 조사하는 합동수사본부장에 임명되었습니다. 전두환은 차기 권력구조에서 중심적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만큼 권력기관으로 부상한 보안사령관으로써, 군부내의 정보를 독점하면서, 합동수사본부장으로써 군, 검, 경(검찰, 군검찰, 중앙정보부, 경찰, 헌병, 보안사)의 모든 공안기관의 업무를 조정, 감독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특히 정보기관의 수장이었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10,26의 가장 중요한 관련자로 연행되고 경호실차장 이재전도 직무유기로 조사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전두환은 국내의 모든 정보를 독점할 수 있는 지위를 획득한 것입니다.

이처럼 갑작스런 박정희의 죽음이후 빚어진 절대권력의 공백 속에서 가장 먼저 부상한 집단은 박정희 죽음의 진상규명 책임을 맡은 합동수사본부장 보안사령관 전두환과 육사11기 동기생들이 주축이 된 하나회세력이었습니다. 육사 11기는 4년교육을 이수한 정규육사 1기라는 자부심으로 단결력이 높았으며, 특히 전두환은 5.16쿠테타 당시 대위계급으로 육사생도들의 5.16지지선언을 이끌어내는 등 정치지향성이 높았습니다. 이러한 공로로 박정희의 보살핌을 받았고, 1963년에는 전두환을 수장으로 정호용, 노태우, 김복동 등 육사 11기 동기생들이 주도하고 각 기수별 후배들을 참여시켜 군사쿠테타를 예방하기 위한 박정희의 군부 친위조직이며 비밀사조직으로 하나회가 탄생되었습니다. 때문에 하나회 회원들은 진급과 보직에 특혜를 받았고, 10.26 당시에는 수도권 인근 주요 군부대의 사단장 보직을 맡는 등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하나회는 보안사령관 전두환(비서실장 허화평, 인사처장 허삼수, 대공처과장 이학봉)을 중심으로, 9사단장 노태우, 수경사(30경비단장 장세동, 33경비단장 김진영, 헌병단장 조홍, 헌병단 부단장 신윤희, 33헌병대장 최석립), 육군본부(범죄수사단장 우경윤, 헌병감실과장 성환옥), 제 50보병사단장 정호용, 20보병사단장 박준병, 71방위사단장 백운택, 공수특전여단( 제1공수여단장 박희도, 제3공수여단장 최세창, 제5공수여단장 장기오), 청와대(경호실장 직무대리 정동호, 경호실 작전담당관 고명승)는 물론 하나회 후원자로 황영시(제1군단장), 유학성(군수차관보), 차규헌(3군단장) 등 기동성 있는 막강한 힘을 보유한 세력이었던 것입니다.

이와 별도로 유신체제에 의해 수혜를 입은 관료집단은,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을 중심으로 유신헌법에 의해 정치일정을 진행하여, 12월 6일 개최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대회에서, 재적 대의원 2560명 중 2549명(11명 불참)이 참석하여 2465명(96.7%)의 압도적 찬성으로 대통령권한대행 최규하를 대통령으로 선출했습니다. 대통령으로 선출된 최규하는 개헌을 위한 빠른 정치일정을 진행하겠다고 선언하고, 12월 8일 DJ의 자택연금을 해제하여 3김씨를 현실정치에 복귀시켜 3김시대를 열었으며, 긴급조치로 구속된 1000여명의 민주인사들을 석방했습니다. 민주화의 훈풍이 불어오는 듯 했지만, 군부의 새로운 실력자로 부상한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10.26사건의 수사과정에서 관련의혹을 받고 있는 중앙정보부와 경호실 조직은 물론, 검찰총장, 치안본부장까지 보안사로 불러들여 포섭하고, 하나회 조직을 결집하면서 군내부의 공식 지휘계통을 무력화시키고 정국을 움직일 태풍의 눈으로 부상했습니다.

2) 12.12 하극상 군사반란

절대권력이 사라진 통치시스템의 공백에서, 상명하복의 지휘계통과 기동성을 바탕으로 60만 대군을 배경으로 가진 군부의 움직임은 절대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정치적 변화에 민감한 군내부의 비밀사조직 하나회는, 10.26 조사과정에서 비약적으로 힘이 커진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중심으로 세력을 결집하면서 군내부의 주도권을 잡으려 했고, 인사권 등을 둘러싸고 공식지휘계통 수장인 계엄사령관 정승화세력과 충돌하고 있었습니다. 정승화는 안하무인격으로 설치는 전두환 등 하나회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수도권 군부대의 주요 보직을 독점하고 있던 하나회 출신 군간부들의 지방전출 계획을 마련하였고, 전두환을 동해안경비사령관으로 전출시키려고 12월초 국방부장관 노재현에게 재가를 신청했습니다. 보안사 정보조직망을 이용하여 정승화를 감시하면서 불만세력을 결집하며 반란의 시기를 기다리던 전두환은 밀리면 안된다고 판단하고 정승화를 연행하기로 결심하고, 사단장급 실세인 육사11기 하나회 동기들의 반란결의를 이끌어 내었습니다. 그리고 12월초 정승화가 김재규의 10.26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명분으로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 인사처장 허삼수, 육본 범죄수사단장 우경윤 등에게 정숭화 연행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하여, 12월 12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생일잡잔치"로 명명된 정숭화계엄사령관 연행계획을 실행했습니다.

10.26 이후 향후 권력지형을 바꾸었던 하극상 군사반란이 실행되면서 가장 긴박한 시간을 보냈던 12월 12일 저녁 전두환은, 경복궁의 30경비단(단장 장세동)에 반란군 수뇌(군수차관보 유학성, 1군단장 황영시, 수도군단장 차규헌, 9사단장 노태우, 50보병사단장 정호영, 20보병사단장 박준병, 71방위사단장 백운택, 1공수여단장 박희도, 3공수여단장 최세창, 5공수여단장 장기오)들을 집결시켜 배신을 차단하고 연행사태 이후 상황에 대해 공동대응케 하였으며, 사전 포섭한 경호실장 직무대리 정동호, 경호실 작전과장 고명승, 30경비단장 장세동, 33경비단장 김진영, 수경사 헌병대장 조홍 등에게 수도권 군부대의 이동을 차단토록 조치하면서,

정승화측 공식지휘계통 핵심 수뇌부인 특전사령관 정병주,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헌병감 김준기를 보안사 비서실장 허화평을 시켜 연희동 요정으로 초대토록 유인하여 정승화연행에 대한 초기대응을 차단하면서, 박희도의 1공수여단과 장기오의 5공수여단으로 하여금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케 하여 육군지휘부를 무력화시켰습니다. 그리고 보안사령부에 인사처장 허삼수, 정보처장 권정달, 보안처장 정도영, 대공처장 이학봉, 육본 범죄수사단장 우경윤을 상주케 하여, 허삼수, 우경윤과 33헌병대 소속 헌병 50명으로 육군 참모총장 공관에 난입하여 계엄시령관 정승화를 보안사 서빙고분실로 연행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국방부장관 노재현과 연락이 두절되어 정승화 연행에 대한 대통령 최규하의 사전재가를 받지 못하고 연행했기 때문에, 이후 하극상 내란행위로 처벌받게 되었습니다. 12.12 하극상 군사반란을 성공시켜 계엄사령관 정승화세력을 무력화시킨 전두환 등 하나회 세력은 걸림돌이 될 만한 장성 96명을 숙청하고 군권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이처럼 보안사령관 전두환 등 하나회가 주축이 된 신군부는 군내부의 정보를 독점하면서 헌정질서를 파괴하고 하극상 내란을 일으켜, 군권을 장악했으며 나아가 군사독재정권의 연장까지 꿈꾸고 있었습니다. 최규하대통령이 공군참모총장 출신의 주영복을 국방부장관으로, 중앙정보부장이던 이희성을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했지만, 전두환 등 신군부세력의 눈치를 살피는 얼굴마담에 불과했습니다.

3) 충정훈련과 K(King)-공작계획

전두환 등 신군부세력이 12.12로 군권을 장악하고 정부시스템을 무력화시켜 권력의 중심에 서면서, 박정희의 죽음이후 장래가 불안정해진 정치제도권에 또아리를 틀고 있었던 유신잔재세력들이 신군부세력 주변에 모여들기 시작했고, 보안사 조직을 중심으로 정권찬탈과 군사정권 연장음모를 노골화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전두환 등 신군부세력은 민주회복을 염원하는 대다수 국민들의 뜻과는 반대로 민주주의로의 진행과 발전을 가로막는 암덩어리 세력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12.12하극상 반란 이후, 짧은 시간내에 60만 대군의 공식 지휘계통을 완전히 장악하여 태풍의 눈이 된, 보안사령관 전두환의 주변에는 은밀하고 치밀하게 정권장악을 위한 계획이 세워지고 있었습니다. 시위진압을 위한 충정훈련이 시작되었으며, 언론장악을 위한 K-공작계획이 준비되고 있었지만, 거의 모든 정보가 차단되었기 때문에 국민들은 신군부의 동정에 대해서 깜깜이 였습니다. 1980년 2월초부터 시위대의 초동진압을 목적으로 신군부 지휘부는, 대정부 전복행위와 소요진압작전 투입부대인 수방사 예하사단과, 특전사 1·3·7·9여단, 수도권의 20, 26, 30, 33사단 등 '충정부대'를 중심으로, 시위대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을 고조시킬 목적으로, 충정훈련이라는 이름으로 외출, 외박을 금지하고 시위대와 진압군의 역할로 나누어, 지옥훈련 강도의 공세적 폭동진압훈련을 시작했습니다.

다른 한편 보안사를 통해 여론동향을 파악하고 정치전면에 나설 기회를 살피고 있었던 전두환 주변에는, 권력의 냄새를 맡고 몰려들기 시작한 불나방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 중에는 철저한 보도검열과 엄격한 보도지침을 통해 언론장악 계획을 제안한 허문도같은 약삭빠른 모사꾼들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제안에 솔깃해진 전두환은 1980년 3월 1일 중장 진급과 함께 보안사에 언론대책반을 만들고, 자신에게 충성심이 강한 보안사 참모진 3인방(권정달, 허화평, 허삼수)을 앞세워 언론을 통제하는 내용(언론포섭, 언론 길들이기, 여론조작)을 구체화한 K(King)-공작계획을 만들어서 실행에 옮기고 있었습니다. K공작의 K가 유신헌법에 의한 체육관 선거를 통해서 전두환을 King으로 만들기 위한 계획이었는지, 아니면 3김씨를 제거하기 위한 계획이었는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K공작계획에 의해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보안사 언론대책반 요원들은 K공작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주요일간지와 방송국 등 언론사 간부 94명을 접촉하면서, 단결된 군부의 기반을 주축으로 지속적인 국력신장을 위한 안정세력을 구축하자고 설득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에 동의하는 우호적인 언론사 간부 40여명을 포섭했으며, 포섭된 언론사 간부들의 영향력을 통해 안보위기론을 부각시켜 강력한 지도자의 필요성을 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신속하게 정권장악 계획을 실행하던 신군부의 움직임은 워낙 은밀했기에, 학생운동 지도부는 물론 언론이나 정치권 등 어디에도 포착되지 않았습니다.

4)전두환의 중정부장 서리 겸직

4월 14일, 물밑에서 움직이던 신군부의 핵심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직한다는 발표가 있었습니다. 전두환의 중정부장서리 겸직은, 정보기관 독점과 권력집중을 통해 전두환이 집권세력의 차기 대권도전자가 되었음을 선언하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또한 이는 12.12 하극상 쿠테타로 군권을 장악한 신군부세력이 전두환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정승화세력을 완전히 제압하고 군부내에 더이상 경쟁세력이 없어졌다는 자신감을 표현한 사건으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최규하, 신현학 등으로 대표되는 기회적 유신잔재 관료세력의 인정까지 받아낼 현실적 힘을 보유했다는 대국민 과시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전두환 세력은 권력장악 의지를 공개적으로 드러낼 만큼 집권세력 내부의 반대파 및 경쟁자들을 빠른 시간내에 제거하고, 권력시스템을 신군부 중심으로 안정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중앙정보부장을 겸직한 조폭스타일의 전두환은, 군복과 권총을 착용하고 무력을 과시하며 국무위원회에 참여할 합법적 신분을 확보했으며, 중앙정보부에 보유중인 800억원의 현금을 정권장악에 동원할 실탄으로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3. 80년 민주화의 봄의 학생운동

가. 80년 학생운동의 전개

노동자, 민중 등 민중운동 조직이 전략적 구상을 세워낼 만큼 성장해 있지 못한 상황에서 학생운동세력은 긴급한 정세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세력이 되었습니다. 특히 긴급조치시대를 거치면서도 꾸준히 저항을 키워왔던 학생운동은 애국운동의 선봉에 서 있다는 자부심으로 방학동안 임에도 불구하고 학도호국단 체제를 해체하고 학생들의 자치조직을 복원하는 학생회 부활을 추진하였습니다. 이에 2월 15일 문교부가 학도호국단 개선방안을 의결하는 등으로 학생회 부활 움직임을 잠재우려 했으나 이는 오히려 학생들의 비판과 관심을 증대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이렇게 불붙기 시작한 학생회 부활 움직임은 공청회 등을 거치면서 개강 전에 새로운 학칙을 협의해 내는 등의 성과를 얻기도 했습니다. 특히 학칙 개정안 중 학생회장 입후보 자격을 B학점 이상으로 한정하여 타협한 점은 평등권을 위배한 측면이 있으나 오히려 운동권 출신 후보건 아니건 어느 정도 학교생활을 해왔고 학생대중들이 신뢰하는 후보를 선별해내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학생회 부활 움직임은 개강을 맞으면서 학생대중들의 가세와 관심이 늘어났고,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탄력을 얻어 자치적 학생회를 구성해내는 대학이 늘어가고 있었습니다. 간선제를 채택한 서울대가 3월 28일, 연세대가 3월 27일 총학생회를 조기에 구성하고 대의원회, 써클연합회 등 학내자치조직 부활을 위한 시동을 걸었습니다.

이처럼 학생회를 구성한 대학은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시대상황이 부여한 학생운동의 역할과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려는 움직임을 시작했으며, 학교별 운동역량과 조건에 따라 학생회부활추진위원회,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 등의 그룹이 만들어져서 다양한 구호로 학내문제에 간섭하기 시작했습니다. “경찰의 학원사찰 중단, 학원의 자율성 회복, 어용교수 퇴진, 재단비리와 학내비리 척결” 등의 해결을 요구하며 3월말에서 4월초에는 이미 전국 14개 대학 이상에서 학원민주화를 촉구하며 시위와 농성이 이어졌습니다.

특히 70년대 반유신운동은 몇 사람의 헌신적인 선도투쟁과 소수학생대중이 참여하여 한시간여의 투쟁을 이끌기도 힘들었지만, 80년 학생운동은 10.26이후 유신체제의 억압적 통제를 벗어나려는 민주화의 봄 시기의 분위기와 맞물려, 학교에 경찰병력이 투입 · 진압하지 않는 허점을 틈타 수백명에서 수천명의 학생대중이 참여하는 대중투쟁이 되었으며 몇시간씩 지속될 수 있었고, 농성 등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총장퇴진 투쟁을 시작한 중앙대, 한양대처럼 4월 8일부터 5월 17일까지 총장실을 점거하여 농성한 대학도 있었습니다.

나. 80년 학생회장단 모임의 태동과 역할

이러한 학내외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분위기 속에서, 4월 9일 숭전대 총학생회장에 당선된 윤여연은 안개에 가려진 신군부에 대한 학생운동의 공동대응 필요성을 절감하고 고교 4년 후배인 서울대총학생회장 심재철에게 학생대표자 모임을 만들 것을 제안했습니다. 제안을 받아들인 심재철의 주선으로 4월 9일 저녁 신촌 중국집 청원에서 이대총학생회장 안숙, 심재철, 윤여연이 만나 시국상황 등의 정보를 공유하고 공동대응을 위해 더 많은 학생대표들의 참여를 모색키 위해 매일 만나기로 합의했습니다. 다음날 숙대총학생회장 형난옥, 4월 12일경 고대총학생회장 신계륜이 참여했습니다. 이들 5인은 77학번의 심재철, 안숙, 78학번의 형난옥과 74학번 동기에 동갑, 동향이며 광주고 출신 신계륜, 광주일고 출신 윤여연이었으며, 역사적 변곡점 시기의 사명감과 책임감, 우국충정의 열정이 넘치는 착한 젊은이들 이었습니다. 5인은 각자의 성실한 품성에 호감을 느끼는 등 인간적 신뢰를 쌓아서 초기의 학생회장단 모임에 열심히 참여하면서 방향성과 중심을 잡아주는 지도부 역할을 했습니다. 이처럼 불안정한 정세에서 다양한 정보를 공유할 수 있었던 학생회장단 모임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14일경에는 연대 총학생회장 박광호, 서강대 총학생회장 박성혁 등이 참여하여 몸집을 키워 줬습니다.

이 시기의 총학생회는 유신 이후 최초로 만들어진 자주적이고 공식적인 학생대표 조직으로서, 총학생회장이란 대중운동 지도부를 만들어낸 학생운동세력이 이처럼 학원민주화 투쟁의 열기를 모아낼 학생회장단 모임이란 틀을 만들어 내면서, 기동성 있게 신군부에 맞설 세력으로 서서히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학생회장단 일부는 4월 14일 전두환의 중정부장서리 겸직보도를 접하면서, 시간 싸움에서 뒤쳐진 대학생들의 연대저항투쟁이 좌절될 가능성이 높아졌으며 “졌구나”라는 패배적 판단을 했습니다. 하지만 섶을 지고 뛰어드는 불나방 처지이고 달걀로 바위를 깨트리려는 무모함이 있지만, 피끓는 젊은이로써 역사의 제단에 쓰이는 불쏘시개가 될지언정 저항투쟁을 멈출 수는 없다고 결사항전의 각오를 다지고 있었습니다.

4월 15일경 언론은, 전국적으로 총학장 퇴진투쟁(21개대학), 어용교수 퇴진투쟁(24개대학), 재단비리 척결투쟁(11개대학), 학교시설확충투쟁(11개대학)으로 집계될 만큼 전국의 대학은 투쟁열기로 들끓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이러한 각 학교 동향과 총학생회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이 절대적인 만큼 학생회 간부들의 책임감이 커졌으며, 학생대중들의 요구와 시국 돌아가는 정보에 목말라 했기 때문에, 4월 중순이 넘어가면서 학생회장단 모임 참여폭은 빠른 속도로 확대되었습니다. 4월 16일 저녁 총학생회장단 모임에는 서울대, 숭전대, 이대, 숙대, 고대, 연대, 서강대, 외대, 성대, 중앙대, 홍익대, 건대, 동국대, 성신여대, 서울여대 등의 총학생회장들이 참여했으며, 다양하게 제기되는 학원민주화투쟁과 불투명한 시국에 대한 학생대표들의 1차 대국민성명을 발표하기로 합의하고 연대서명 했습니다. 각자가 안면 있는 기자들에게 연락하기로 했으며, 4월 17일 오후 연대 학생회관에서 연대회장 박광호가 낭독한 대국민성명서에는 “비상계엄해제, 정부주도 개헌반대, 언론자유 보장” 등의 내용이 담겼습니다. 이에 대해 4월 18일 문교부는 전국적으로 휴교 19개교, 철야농성 24개교, 어용교수 퇴진요구 24개교, 시설확충요구 11개교, 학원자율화 요구 20개교라고 발표했으며, 문교부장관 김옥길은 학생들의 자숙과 면학분위기 회복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다) 사북항쟁과 노동자, 민중운동

4월 21일, 5000여명의 광부들을 고용하고 있었던 강원도 정선군 사북지역의 동원탄좌에서, 사측의 횡포와 어용노조 집행부를 규탄하기 위해 모여든 노동자들이 사북지서를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사북탄광노동자들이 회사측과 어용노조를 규탄하기 위해 모인 집회에서, 노노분쟁을 감시하던 정선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이 노동자들에게 발각되어 찝차를 타고 도주하면서 이를 막던 노동자를 차밑에 깔아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회사측과 어용노조만을 옹호하던 경찰들에 대한 불만이 커져 있었던 노동자들이, 차에 깔린 동료가 죽었다는 생각에 흥분하여, 곡괭이와 몽둥이를 들고 항의하기 위해 사북지서로 몰려가자, 경찰들이 도망가버려 노동자들이 사북읍내를 점거하게 된 것입니다. 다음날 400여명의 경찰기동대가 진압작전에 투입되어 노동자들을 광업소까지 몰아냈지만, 한과 고통의 세월을 살아온 분노한 노동자들과 부인들까지 합세하여, 광업소 입구 철길에서 잔압하려는 경찰들과 투석전 등으로 결사적으로 맞섰습니다. 폭약 등 곳곳에 무기고를 갖고 있는 탄광의 특수성 때문에 불상사를 우려한 경찰들은 강경한 진압작전을 펼칠 수 없었고 대치상황이 이어졌습니다. 결국 군 투입까지 검토하던 정부는 4월 24일 노동자대표와 협상테이블을 마련했으며, 노동자들의 요구조건을 수용하면서 사북항쟁은 마무리되었습니다.

이처럼 재벌중심의 특혜와 수탈이 일상화된, 개발독재라 불리는 천민적 경제구조에서, 일방적으로 희생만을 강요당해온 노동자들도, 폭압적인 유신체제 권력이 갑자기 종식되면서 분노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동안 사업장의 병영적, 억압적 규율 속에서 희생을 강요당해온 노동자들이, 민주화의 봄의 분위기에서 임금인상, 어용노조 규탄, 체불임금 지급, 복지 등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면서, 1979년 105건이었던 노동분규가, 1980년 4월까지 확인된 노동분규만 해도 627건으로 집계될 만큼 확산되었습니다. 특히 그 중에서 역사가 깊고 투쟁강도가 높은 강성조직이며 중형이상의 사업장인 철강과 화학 업종의 분규가 증가했습니다. 사북항쟁 이후의 중대형 노동분쟁만 해도, 인천제철, 일신제강, 동국제강부산공장, 원진레이온, 금성통신 안양공장, 동양나이론 울산공장, 대한모방, 반도상사, 대우중공업, 세진전자, 동명목재, 롯데제과 등 많은 사업장에서 농성을 했으며, 동국제강 부산공장은 경찰과 투석전을 하는 등 노동자 투쟁이 격화되고 급증했습니다. 사북항쟁은 이처럼 노동분쟁뿐만 아니라 학생운동을 활성화시키는 촉매제가 되었고, 병영집체훈련거부 등 학원내의 병영문화 청산이라는 정치적 구호를 더욱 확대시키는 역할이 되었습니다.

라) 학생운동의 사회민주화투쟁으로의 전환

이처럼 사회전반의 분위기는 들끓고 있었지만, 권력 내부에서 누가 어떻게 주도권을 장악하여 행사하는지, 신군부 등 유신잔재 권력의 움직임은 오리무중이었으며, 사회 각 영역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도 언론보도를 확인하는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때문에 정보에 목말라했던 서울지역 총학생회장단은 1~3일 간격으로 모여 정세변화와 각자가 수집한 정보들을 확인하고 각 학교의 상황을 점검하면서, 각개격파되지 않도록 연대를 위한 속도조절 노력을 지속했습니다. 4월 28일에는 종로의 한일관에서 서울지역 대학 총학생회장단 모임이 개최되어, 서울대 조사단의 사북항쟁 등 노동관련 분규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이후 각 학교의 투쟁상황을 점검하고, 5월 학생운동의 방향을 사회민주화 요구로 전환하는데 대해 논의했습니다. 그리고 대중동원력을 확대시키기 위해서 총학생회와 학생대중 사이의 벽을 허물고 언로를 열어 줄 수 있는 신문고 설치나, 과토론회와 단과대 토론회, 비상학생총회 등의 다양한 전술을 실천해보자고 제안되었습니다.

계속해서 학생들의 사회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노동현장의 투쟁도 확산되자, 신군부는 4월 29일 전군지휘관회의를 개최했습니다. 그리고 4월 30일 계엄사령부는 사회적 분쟁의 확산을 차단하기 위해 과격한 학원 소요와 노사분쟁에 대해서 단호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발표하면서, 폭력행위를 엄단하겠다고 공포감을 조성했습니다. 이와 함께 신군부는 병영집체훈련 거부를 명분삼아 K공작팀을 가동하였으며, 포섭된 언론인들을 앞세워 북한남침설 등 분단상황의 군사위기를 과장하는 등 여론을 조작했으며, 병영집체훈련 거부는 불순한 세력의 개입으로 매도했습니다. 그리고 나중 확인된 사실이지만, 5월 3일 시위를 초기 진압하겠다는 명분으로 충정부대를 서울과 수도권, 부산, 광주 등에 배치하여 충정훈련을 받은 군부대로 주요 도시들을 포위했습니다. 무뢰배 전두환을 중심으로 결집한 신군부세력은 5월초에 이미 소요사태의 진압과정에서 명분을 획득하여 야당 정치세력을 제거하고, 물리적 힘에 굴복하는 허수아비 기회주의 세력인 최규하 등 유신관료세력을 손쉽게 제압하여 자연스럽게 권력을 장악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신군부세력의 기동성과 꿍꿍이를 알턱이 없었던 5월 3일 학생회장단 모임에서는, 학생운동 역량이 가장 큰 서울대가 국민여론을 감안하여 입영을 선택키로 결정했다는 설명과, 5월 2일 서울대 민주광장에서 개최된 민주화행진에 1만명 이상의 학생이 참여했다는 서울대 학생회측의 보고를 들었습니다. 이어서 군사독재정권을 연장하고 유신체제를 존속시키려는 신군부세력의 음모를 폭로하는 학내 대자보 작업을 강화하여 신군부세력에 대한 학생대중의 분노와 적개심을 고조시키자고 뜻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국민들의 동조와 참여폭을 확대하기 위해 중국의 5.4운동을 본따서 남대문시장 등 서민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선전선동을 강화해 보자는 등의 전술을 실천하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들뜬 사회분위기 탓인지 5월초를 지나면서 곳곳에서 학생대중들의 폭발적 역동성이 확인되었으며, 서로 영향력을 주고 받은 탓으로 각 학교의 학생운동의 구호도, 어용교수 퇴진 등 학내문제 이슈에서, 자연스럽게 "계엄해제", "전두환, 신현학 퇴진" 등 사회민주화 요구 구호로 방향전환을 했습니다. 5월 6일 하루만해도 서울에서는 "계엄을 해제하고, 신군부의 군사정권연장 음모를 저지하여 민주주의를 쟁취하자!"는 구호로 이대, 외대, 한신대, 동국대, 연대, 홍익대, 중앙대 등에서 시위와 농성이 있었고 숭전대총학생회가 주도한 교문밖 진출의 투석시위가 있었으며, 교수들의 시국선언에 대한 언론보도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총학생회가 대중적 동원력을 확보해서 힘이 커진 대학캠퍼스는 경찰력만으로는 함부로 할 수 없을 만큼 해방구화된 요새처럼 변해, 언제라도 싸울 힘을 비축하고 전민항쟁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5월7일 학생회장단모임에서는, 행보가 빨라진 신군부에 대항하여 힘있는 연대투쟁을 하기 위한 적정한 시점을 포착하려면, 더 많은 대학이 연대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총학생회를 구성하지 못한 대학 대표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하고 참여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렇게 문호를 확장하여 고대 학생회관 3층 회의실에서 개최된 5월 9일 회의에는, 서울대, 고대, 이대, 숙대, 숭전대, 연대, 성대, 서강대, 건대, 동국대, 서울여대, 성신여대, 외국어대, 전북대 등 주로 서울시내 약 20개 대학의 학생대표들이 모였습니다. 모임에서는 각 학교의 학생대중들의 시위동참 열의에 대해 확인하고, 현시국에 대한 청년학생들의 결의를 모아, 총학생회장단 모임의 이름으로 기자회견을 하기로 결의했습니다. 각 학교 대표들은 고대에서 급히 마련한 "현시국에 관한 제2차 공동성명서"를 검토하여 연대서명하였고, 고대총학생회장 신계륜이 기자들에게 성명서를 발표하였습니다. 성명서의 내용은 “비상계엄 해제” “정부주도 개헌 중지” “언론자유보장” 등 사회민주화에 대해 학생대표들의 입장을 밝히고 공동투쟁의 결의를 담은 내용이었습니다.

이어서 열린 5월 11일 서울대에서 열린 학생회장단 모임에서는, 처음 참석한 대표들을 중심으로 각 대학의 특수성에 맞추어 활동하자는 등 공동투쟁을 방해하는 책임감없는 의견들이 개진되었고, 난상토론이 되었습니다. 특히 학생대중들에 대한 총학생회의 통제가 어려워진 연세대, 홍익대 등 서부권 대학들이, 선도투쟁을 주장하는 급진적 학생들의 시위를 제지할 수 없으며, 5월 13일 광화문 일대에서 시위를 할 예정이라고 통고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각 대학 학생들의 학내외민주화 요구에 대한 결의를 모아내기 위해, 5월 16일 오후 6시부터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전국의 모든 대학 학생대표들에게 연락하여, 시국상황에 공동대처하기 위한 전국학생회장단 모임을 개최하기로 결의했습니다. 이외에 서울에서는 각개격파되어 고립되는 최악의 상황을 면하기 위해, 공동투쟁을 깨고 나가려는 움직임에 대처하여 전국적 공동투쟁을 만들 필요성이 제기되었습니다. 책임감을 갖고 논의할 수 있도록 학생회장단 모임의 조기 개최가 필요해져서 휴게시간을 이용하여 심재철, 신계륜, 윤여연이 별도로 막후에서 논의하여, 장소 사용이 가능한 고려대에서 13일 밤에 대표성을 갖고 모이기로 결정했습니다.

마) 무기한 전국적 가두투쟁 결의

5월 13일 밤에 열린 고려대 회의에는, 서울대, 고대, 이대, 숙대, 숭전대, 연대, 성대, 서강대, 건대, 중앙대, 외대, 명지대, 국민대, 한양대, 덕성여대, 성신여대, 서울여대, 총신대, 서울신대 등 7개 신학대학을 합쳐 약 25개 대학총학생회장들이 모였습니다. 서울대 대표가 5월 12일 저녁 서울대 정문에 계엄군이 진입했다는 잘못된 정보를 전달받고, 학생지도부의 피신 지시로 농성중이던 2000여명의 학생들이 해산했으며, 이에 대한 비판여론이 컸다는 등 신군부의 재등장 움직임이 빨라졌음을 암시하는 사건이 보고되었습니다. 그리고 연세대 학생들이 주축이 된 13일 광화문 시위에서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연세대 학생대표의 과장된 발표가 있었고, 전방에서 전두환 등 신군부세력과 정승화세력 간에 교전이 발생하는 등 권력내부의 암투가 심상치 않다는 확인되지 않은 정보도 전해졌습니다. 시위중 사망자까지 발생한 상태라면 학생대중들의 시위동참 열기를 통제하기 불가능하다고 보여졌고, 힘 한번 못쓰고 각개격파 당할 수 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혁명적 투쟁결의가 필요했기 때문에 정회를 요청했고, 휴게시간을 이용하여 별도로 윤여연, 신계륜, 형난옥, 유시민이 모여 학생운동 지도부가 준비해야 할 사항을 급하게 점검했습니다.

첫째, 경찰력 분산을 위해 각 학교별로 교문밖 진출투쟁을 하고, 강남의 대학은 영등포로터리에, 서부의 대학은 공덕동과 신촌로터리에, 강북의 대학은 청량리, 강동의 대학은 동대문운동장 등 4개 거점에 집결해서 시청과 청와대로 향하기로 했습니다. 둘째, 시위용품 준비에 관하여는, 사북항쟁처럼 투석과 화염병이 난무하는 치열한 전투가 될 것이기 때문에, 유인물이나 방송시설 등은 전투현장의 필요에 따라 준비하면 될 것이고, 별도로 준비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세째, 학생운동 지도부의 역할에 대하여는, 학생시위가 혁명운동으로 발전해가면 시민과 노동자민중이 결합할 것이고, 학생운동 지도부는 혁명운동의 발전을 가로막는 역할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투쟁현장의 지도는 노동자, 민중 등 현장투쟁지도부에게 맡겨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네째, 신군부가 계엄을 확대하고 휴교조치하면 서울지역 4곳(강남의 대학은 영등포로터리에, 강서의 대학은 공덕동과 신촌로터리에, 강북의 대학은 청량리광장, 강동의 대학은 동대문운동장) 등 전국 각 지역별로 거점을 지정하여 다음날 10시에 거점지역에 집결하여 신군부가 퇴진할 때까지 저항투쟁을 이어가기로 했고, 지방학교의 연락은 역량이 풍부한 서울대에 맡기기로 했습니다. 다시 속개된 회의에서 윤여연, 신계륜, 형난옥이 주도하여 5월 14일부터 신군부가 퇴진할 때까지 "전국적 무기한 가두투쟁"을 하기로 결의를 이끌었습니다. 역사적 변곡점이었던 1980년 학생운동 지도부가 앞장서서, 역사적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 다시는 못볼 수도 있겠다는 결사적 각오로,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이고 마지막이 되어버린 혁명투쟁을 결의하게 된 것입니다.

바) 5월 14일, 15일 가두투쟁

각 학교에서 교문밖 진출을 저지하는 경찰병력을 뚫고 오후 2시경, 강남지역 학교 집결지인 영등포로타리에 모인 서울대, 숭전대, 중앙대, 총신대 등 대학생 35,000여명 시위대의 주력은 “계엄해제” “전두환, 신현학퇴진”, “노동3권보장” 등의 구호를 외치며 여의도로 향했으며, 노동자의 동참을 요구키 위해 여의도 한국노총 앞을 지나갔으나 농성중인 노동자들조차 시위동참 요구를 거부하고 해산해 버렸습니다. 시위대는 마포대교에서 경찰의 차량방어선에 막혀 충돌했으나, 일부 대오를 남겨두고 원효대교 부교를 거쳐 시청앞으로 진출하여 새벽까지 경찰과 대치하며 시위하였습니다. 특히 중앙대 백남기, 송기원 등은 상여를 운반해와 서울역에서 전두환 등 유신잔당 화형식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서부지구에서는 경찰의 봉쇄가 강력하여 2~3천명의 학생들만이 신촌로타리에 집결하여 광화문 진출을 위해 시위하다가 해산하였고, 북부지역은 청량리 광장에서, 동부지역은 동대문운동장 일대에서 시위하면서 광화문 진출을 기도하였습니다. 하지만 기대했던 시민들의 동참은 이끌어내지 못했고, 신군부의 움직임도 없었습니다.

5월 15일에는 각학교 교문앞 저지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는지 가두진출에 대한 경찰병력의 방해는 없었으며, 숭전대학교는 2500여명의 학생들을 군대식으로 편재하였고, 척후대와 전령을 가동하고 대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북을 치면서 남영동 미군부대 앞을 지나서 서울역에 도착하였습니다. 전투부대가 등장했다고 생각했는지 후방의 학생들이 대오의 선두인 남대문까지 길을 비켜주어 도큐호텔 앞에서 화염병 등을 투척하며 경찰과 맞섰습니다. 4~5시경에는 서울역에 20만명이 집결했지만, 불만 붙이면 합류할 것 같았던 조직노동자나 시민들의 합류는 없었지만, 숭전대가 위치한 서울역 시위대 전방에서는 보도블럭과 화염병, 정차된 시내뻐스의 경찰방어선 돌진 등의 격렬한 전투가 지속되어 경찰방어선이 조금씩 후퇴하고 있었습니다.

사) 서울역 회군

하지만 서울대의 서울역회군 결정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5월 12일 CBS방송국과 동아일보 등 언론사에 계엄군이 진입하기 시작하고 자정에 비상계엄이 확대될 것이라는 미확인정보를 군사쿠테타 소식으로 판단한 서울대 운동권 지도부는 군부에 맞서 싸우기보다는 학생회관에서 농성해오던 1000여명의 농성대오를 해산하고 도피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서울대 운동권 주류는 5월 학생봉기 정세에서조차 신군부의 물리력에 주눅들어 패배주의의 모습을 보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투항주의적 행태를 보인 지도부에 대해 격렬한 내부비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봉기에 참여한 대학생들이 서울역광장 일대를 채우는 등 학생시위가 절정이었던 5월15일 17시경, 서울대 복학생 대표들(김모, 이모, 박모, 김모 등)과 재학생지도부(심모, 유모, 이모 등)가 대우빌딩22층 국제경제연구원에 모여 서울역과 광화문 일대의 시위상황과 철야농성 등에 대한 향후 투쟁방향과 방법을 점검하고, 미국이 신군부의 움직임을 억제하고 있어서 섣부른 행동을 하지 못할 것이니 신군부에 명분을 주는 등 판을 깨지 말아달라는 DJ측의 요구를 경청하면서 내부토론을 하였습니다. 특히 복학생들은 5월 15일 전국적 대규모 학생봉기로 문제제기집단으로써 학생운동의 역할은 충분했으며 언제든지 다시 나올 수 있을 것이라는 논리와, 준비론적 성격의 주류 동아리 출신들이 노동자민중들이 조직되고 준비되지 않은 투쟁의 한계가 지적되면서 서울대 지도부회의에서는 회군이 대세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논리에 현장 투쟁대중의 역동성에 의해 운동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확신이 부족했던 심재철 등 재학생 지도부가 설득되었고 서울대의 회군이 결정되었습니다. 이처럼 다른대학 학생회장단들과의 모임을 방치하고 대우빌딩에서 서울대 회군결정을 하고 마이크로뻐스로 돌아와 회군통고를 머뭇거리는 심재철을 지원하기 위해, 시위대의 전방에서 싸우던 강경한 입장의 학생회장들을 배제한 채로 겨우 연락을 받고 도착한 3~4개대학 학생대표들만이 모여 있었던 마이크로뻐스에 이수성학생처장이 직접 올라와 공수부대가 효창운동장 등 서울중요 거점에 집결하고 있다는 과장된 정보를 전달하면서 만약 밤에 군이 투입되면 많은 희생이 따른다고 위기감을 증폭시키고 학생들의 의사를 신군부측에 전달한 사실에 만족하고 안전귀교를 보장할 수 있으니 회군하는 것이 좋겠다고 의견을 제시하였습니다. 이수성교수의 의견에 반대하는 의견도 제시되었지만 학생운동의 주요역량을 담당하고 있었던 서울대의 회군결정 분위기는 순식간에 각 학교로 전달되었습니다. 때문에 17시경 학생회장단 모임이 예정되었던 서울역그릴에는 학생회장단들이 엇갈려 도착했기 때문인지 학생회장단모임 구성원들을 찾을 수 없어서 숭전대 대오로 돌아와 싸움의 최전선인 남대문에서 싸우던 윤여연은 서울역광장에 있는 서울대 마이크로뻐스로 급히 와달라는 통보가 와서, 19시 30분경 뻐스에 올라가자 심재철이 "선배님, 저희 회군하기로 결정했어요."라고 해서 "혁명하자고 나와서 무슨 회군이냐? 나는 못한다."라고 화를 냈습니다. 얼마후 신계륜이 올라와서 "시경이 화염병 사정거리에 있다."고 응원의 발언을 해주었지만 서울대의 회군 결정을 철회시킬 수 없었습니다. 이후 시위대 전방의 전투는 계속 되었지만 서울역광장에 앉아 응원을 보내던 서울대 대오 등이 이탈하면서, 후방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서울역시위는 더이상 진행될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전국적 무기한 가두투쟁이라는 5월봉기 결정은 학생회장단모임이 결정했지만, 서울역 회군은 서울대 운동세력의 독단적인 결정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의 서울대 주류 운동세력과 DJ세력 등 정치권은 5.18항쟁 42주년이 된 지금까지도 서울역 회군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그동안 엄청난 삶의 굴절을 겪으며 희생해온 학생회장들에게 회군의 책임을 전가하는 잘못을 범했습니다. 서울역 마이크로버스에서는 학생회장단 모임이 열릴 수 없는 조건이었다는 것은 상식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열리지도 않은 학생회장단 모임 결정을 운운하면서 그동안 서울역 회군의 책임을 전가해온 서울대 운동권의 비양심적인 행태는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특히 서울대 운동권은 복잡한 중층구조를 갖고 있어서 회군과 같은 중요한 의사결정을 심재철 홀로 결정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심재철 개인에게 역사적 책임을 전가하고 있는 무책임한 행태도 반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대우빌딩 회의에 참여한 서울대 운동권의 지성인으로써의 양심선언이 필요합니다.

아) 이대 전국학생회장단 회의와 5.18 이후

이처럼 엄청난 대중동원력에 당황한 신군부세력이 효창운동장 등에 특수부대인 공수부대를 주력으로 한 3만명 이상의 병력과 탱크부대를 앞세우고 강경진압을 협박하였습니다. 이러한 신군부의 협박과 치열한 분열공작이 기회주의적 정치인과 교수 등을 통해 패배주의에 젖어있던 서울대 일부 운동권 복학생들에게 전달되어, 시위를 중단하고 서울역에서 철수하게 된 것입니다. 서울역회군 당일인 5월 15일 밤, 학생회장단은 고려대 학생회관에서 긴급 모임을 갖고 서울대의 일방적인 서울역회군을 비판하고, 신군부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당분간 가두시위를 자제하고 대국민 홍보에 주력키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서울역 시위 다음날인 5월 16~17일 이대에서 전국 100여개 대학 학생대표들이 모여 전국 규모의 학생운동 조직을 건설하여 사회민주화 투쟁을 강도있게 지속하고 사회운동과의 공동대응을 모색하기 위한 1박 2일의 밤샘회의를 하였습니다. 회의를 빨리 끝내기 위해 사회자로 긴급 투입된 윤여연이 5월 21일 임시국회 개회에 맞춰 2차 전국적 학생봉기를 하자고 결의를 모아내는 시점이었던 17일 18시경, 계엄군과 경찰들이 회의장소를 급습하여 많은 학생대표들이 체포되었습니다.

다행히 몸을 피한 학생대표들은 계엄확대가 선포된 18일 아침 10시경, 영등포로타리 등 서울시내 거점 4곳에 합류하였지만, 진압봉으로 무장한 수백명의 계엄군이 순찰하고 있어서 50~100여명 정도의 인원으로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기에, 4개 거점에 서로 연락하여 2시에 서울역광장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5월 18일 2시경 400여명이 서울역 입구에 모여 스크럼을 짜고 계엄군이 있는 서울역광장으로 행진하다가 계엄군의 최루탄과 몽둥이 진압으로 곧바로 해산되었습니다. 이후 도피한 극소수 학생회장들간의 모임이 있었지만 특별한 활동을 못했으며, 광주항쟁 기간인 5월 18일~26일 사이 서울에서는 윤여연과 서울대사대회장 진영효 등이 모임을 갖고 광주항쟁과 연대결의를 표현하기 위한 5월 23일경 단성사, 피카디리극장 앞에서 소규모 시위 시도 등이 있었습니다. 윤여연은 5월 23일 단성사 시위에 참여하려다가 근처에서, 시위에 참여했다 상경한 전남대생 동생을 만나서 광주의 상황을 전해 들었으며, 고향의 참혹한 상황에 분노한 윤여연은 5월 24일 연대 대표를 만나서 광주상황을 전하고 결사대와 화염병을 만들어서 파출소를 습격하여 광주와 연대하는 결의라도 보이자고 제안했지만, 지금은 도피할 때라는 답변만을 들었습니다. 답답했던 윤여연은 5월 26일 오후 모학생대표에게, “광주에서 계엄군이 환각제를 먹고 여고생의 유방을 도려내는 등 가혹하게 2000여명을 살상했다”라고 광주의 참상을 전했는데, 옷가게에 온 손님이 간첩이라고 신고하여 한남동 근처의 뻐스안에서 체포되었습니다.

그리고 5월 26일경, 중앙대생 이석표, 이상 등은 동작구 일대에 광주참상을 알리는 유인물을 배포하였고, 5월 29일에는 이대생 최정순이 영등포 연흥극장 옥상에서 광주참상을 알리는 유인물을 뿌리고 시위를 주도하다 검거되었고, 한빛교회 대학생회와 고대 기독학생회 회원들이 모임을 갖다 “8백만 서울시민에게 고함”이란 유인물이 발각되어 구속되기도 했습니다. 5월 30일 기독교회관 옥상에서 EYC농촌간사 서강대생 김의기가 “유신괴수가 쓰러졌지만 그 잔당들이 혹독한 탄압과 유혈참극을 일으키고 있다”라는 내용의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뿌리고 투신, 사망했습니다. 5월 31일에는 인천시내 고등학교에 반정부 유인물이 살포되었고, 6월 9일 노동운동가 김종태가 이대앞 네거리에서 “우리는 어떠한 책동도 용납할 수 없음을 경고한다. 유신잔당 물러가라! 노동3권 보장하라! 비상계엄 해제하라!”라고 외치며 분신했으며 6월 14일 사망했습니다. 6월 13일에는 서울대 대학원생 이호열 등이 화신백화점 앞에서 광주항쟁의 진상을 폭로하는 유인물을 뿌리고 시위를 시도하다 구속되었고 7월 4일에는 광주일고 13회 동문들이 광주항쟁의 진상을 알리는 유인물을 제작했다가 구속되었습니다. 8월에는 서울대생 신근수, 장재홍이 “학생은 학원으로, 군인은 전선으로, 전두환은 지옥으로”라는 스티카를 붙이다 구속되었으며, 서울대생 이우재와 인하대생 곽한왕, 양홍영, 조용호 등이 인천 시내에 광주참상을 알리는 유인물을 뿌리다 구속되었습니다. 대학은 긴 휴교를 끝내고 1980년 9월 3일부터 2학기를 시작했지만, 전경이 학교 안에 상주하고 학생지도에 대한 교수책임제를 도입하는 등 감시체제가 강화되었습니다. 하지만 5.18항쟁의 진상규명과 민주화를 요구하면서, 경희대, 연대, 성대, 적십자간호전문대, 숭전대, 서강대, 한신대, 동덕여대, 홍익대, 한성대, 고대, 서울대농대, 경기공전, 동국대, 숙대, 세종대, 서울대 등에서 유인물 배포 등 크고 작은 시위가 이어졌으며 1983년까지 1363명이 제적되었습니다.

4. 5.18항쟁과 80년 학생운동의 좌절과 부활

역사의 변곡점이었고 혁명의 시기였던 1980년 학생운동지도부의 “전국적 무기한 가두투쟁“이라는 헌신적인 혁명적 결정이, 역사발전의 불쏘시개 역할이 되어 부마항쟁, 사북항쟁에 이어 5.18항쟁으로 발전되었고, 상호 작용하며 이후 민주화운동을 성장시킨 밑거름이 되어 6월항쟁을 이끌어내는 힘이 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이시기 5.18항쟁은, 12,12로 하극상 군사반란을 일으켜 헌정 질서를 파괴하고 또다시 헌법을 유린하는 5.18 계엄 확대조치를 시행하면서 수많은 민주인사와 학생들을 불법연행하여 고문조사하는 등, 신군부세력의 헌정질서 파괴행위와 탈법 및 불법에 저항하여 일어난 항쟁이었습니다. 이처럼 전민항쟁이 필요했던 시기에 무장하여 도시를 해방구로 만들어 불의한 권력을 타도하고자 했던 5.18항쟁은, “헌법의 존립과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형법 제 20조의 정당행위”였고, 가장 높은 수준의 민주화운동이었습니다. 하지만 5.18항쟁의 전후 시기에 “민주화의 봄” 학생운동을 이끌었던 학생운동지도부는 대부분 예비검속, 수배 후 구속 등으로 수사기관의 밀실 등에서 참혹한 인권유린과 맞닥뜨려야 했고 강제징집 되어 녹화사업을 강요받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대세 결정권을 담당하던 학생운동지도부의 대대적인 검거와 수배로 학생운동은 대중운동 동원기반이 무너졌기 때문에 또다시 지하운동으로 명맥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행인 것은 80년 대중의 역동성을 목격한 젊은 학생들이 광주에서 신군부에 의해 수많은 양민이 학살된 참상을 전해 듣고, 곳곳에서 광주의 진상을 알리고 살인정권의 만행을 규탄하는 대열에 동참하기 시작한 사실입니다. 얼어붙은 대지에 생명의 싹이 움트듯 살아남은 자들의 부채 의식과 양심적 실천에 의해서, 학생운동은 다른 모습으로 부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1983년 80년 학생운동 지도부였던 윤여연, 신계륜, 이우재, 유시민 등에 의해서 복학대책위가 제안되어, 살인정권의 복학조치에 대해 공동대응을 하면서 학생운동의 전국적 조직틀의 맹아가 되었으며, 학생운동은 1984년 유화국면을 맞아 광주참상과 살인정권의 만행을 학생 대중들에게 알려내고 설득하는데 성공하면서 폭발적으로 성장했습니다.

5. 80년 학생운동에 대한 평가

가) 학생회 중심의 확대된 동원력을 기반으로 조직적 · 위력적인 투쟁을 했습니다.

학생회는 다수의 대중을 동원 결집할 수 있는 유력한 대중조직이었습니다. 특히 80년에 구성된 학생회는 유신 이후에 최초로 만들어진 자주적이고 공식적인 조직이었기에 학생대중들의 집약된 요구를 분출할 통로로써 어느 때의 학생회보다 학생 대중들의 폭발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습니다. 또한 격동의 시기에 선출되어진 학생회장단은 대부분 구속을 각오하고 역사를 책임지겠다는 비장한 결의를 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학생대중들의 절대적 지지를 획득해 낼 수 있었습니다. 특히 학생회장단의 맑고 깨끗한 품성과 학생 대중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지도자로서의 단호한 선명성 등이, 학생 대중들도 정파적 차이와 다양한 조건을 뛰어넘어 학생회를 중심으로 단결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고, 각 학교의 역사상 전설이라고 불릴 만큼 가장 많은 학생 대중을 가두투쟁에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나) 학생회장단의 전국적 무기한 가두투쟁 결의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습니다.

조직적 지도 중심을 세우지 못하고 신군부에 대한 국민대중의 분노와 적개심이 성숙되지 않은 시기에 내린 결정이었지만, 개별투쟁에 대한 통제력이 관철될 수 없었기 때문에 전국적 무기한 가두투쟁 결의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습니다. 학생운동의 역할과 임무는 당면 정세에 대한 선도적 정치투쟁을 통한 문제 제기였으며, 이러한 선봉투쟁이 언제나 역사를 한단계 진전시켜 왔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다) 80년 학생운동은 전체운동을 한단계 진전시켰습니다.

80년 학생시위 중 주장된 구호는 “신군부 등 유신잔당 퇴진”, “계엄해제” 등 반독재민주화 구호뿐 아니라 반외세자주화 구호, ”노동3권 보장“ 등 인간해방의 구호가 외쳐졌으며, 이는 70년대의 반유신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고 전체 운동의 방향성을 한단계 진전시켰으며, 이후 사회운동의 올바른 지향점으로 자리매김 했습니다. 특히 학생운동은 조직적으로는 전대협, 한총련 운동으로 발전하였으며, 노동운동은 어용노조 극복과 민주노조 건설을 위한 전노협과 민주노총을 탄생시켰습니다. 또한 그 외에도 전략적 구상을 수행할 전농, 전노련, 전철연 등 전국적 기층조직이 건설되는 계기로 작용하였습니다.

6. 맺음말

5.18계엄확대조치 이후 전국적으로 수만명에게 고문 등 국가폭력을 행사하고, 광주에서 수많은 양민을 학살한 전두환 등 신군부세력은 조폭화되어 법위에 군림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이 되었습니다. 전두환은 최규하 등 유신잔재 관료집단을 협박하여 5월 31일 초헌법적 기관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여 국회의 기능을 박탈하는 등 헌정질서를 무력화했습니다. 그리고 1980년 8월 16일 총칼 등 무력으로 협박하고 공포적 환경을 조성하여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의장인 최규하 대통령을 하야시켰으며 정치적 반대세력인 DJ를 구속하고 YS를 가택연금시켰고, JP를 부정축재자로 몰아 정계은퇴시키는 등 각개격파시켰습니다. 이어서 10월 27일 유신체제를 계승한 헌법을 공포하여 국회 및 정당을 해산하고, 수정된 헌법에 의해 1981년 2월 25일 체육관선거로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등 헌정질서 유린행위를 반복했습니다.

따라서 전두환의 제5공화국은 불법부당하게 최고 통치권력인 대통령을 도둑질한 원인무효인 정권이었습니다. 이처럼 전두환 정권은 정통성이 없었기 때문에 억압통치로 권력을 유지했으며, 사회 각 부문에서 제기되었던 민주화의 열망은 수면 하로 잠복할 수밖에 없었으며, 침묵과 타협 · 투항만이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선택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80년의 좌절은 역사청산과 사회 대청소를 당대에서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유실함으로써 친일파나 그 후손들 및 그들에게 야합한 이들만이 여전히 기득권을 형성하고 부와 권력을 독점하는 악순환이 지속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광주학살의 참상은 이후 모든 정치적 저항의 출발점이 광주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게 만들었으며, 정치적 이해관계와 맞물리면서 지역갈등구조를 심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정부주도의 경제정책 집행의 폐해로 정경유착이 일상화되고, 대외종속성과 사회불평등을 심화시켰으며, 이러한 사회적 모순의 축적은 87년 6월항쟁과 7~9월 노동자대투쟁으로 민중들의 분노를 폭발시키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노태우의 숨통을 연장시켜준 DJ의 중간평가 연기야합과 신군부 집권의 정당성을 인정해준 YS의 3당합당이라는 투항선언, 그리고 1997년 12월 22일 YS · DJ의 담합에 의한 전두환 · 노태우의 특별사면 등 야합이 반복되면서, 한국사회는 수많은 이들의 투쟁과 희생의 성과가 올바르게 계승되지 못하고 올바른 역사청산의 기회를 상실했습니다. 특히 억압적 구조와 제도에 복무한 자들의 양심선언조차 만들어내지 못해 사회기강을 세우지 못한 것은 한으로 남았으며, 부익부 · 빈익빈의 사회불평등은 더욱 악화되어 평등세상 실현에 대한 과제는 후손들의 몫으로 남았습니다.

41년이 지나고 2021년이 끝나가지만, 1980년 세대는 부당한 권력에 맞서고 사회모순의 해결을 위해 정의롭게 투쟁해왔던 봄날의 시대정신을 기억하면서, 한국사회의 근본적 모순해결을 위해 투쟁하는 후배들과 민중들이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대립과 투쟁의 역사에서 힘의 역관계에 밀려 승리할 수도 패배할 수도 있지만, 역사적 요구와 민중의 요구 앞에 주저하지 않고 불의와 비타협적으로 맞섰던 정의로운 저항투쟁이었던, “민주화의 봄”의 시대정신 만큼은 동지적 애정으로 올바르게 정리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민주화의 봄”의 시대정신이, 패거리의 이익이 아닌 사회와 역사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어 인간해방의 대동세상을 건설하는 자양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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