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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변호사' 조영래, '사법고시 합격하고도 변호사 못할 뻔했다'

polplaza 2024. 9. 14.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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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변호사' 고(故) 조영래 변호사(이하 직책 생략)는 굴곡진 시대와 한평생 싸우다 갔다. 1947년 대구에서 태어난 그는 1990년 12월 12일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향년 43세. 한창 왕성하게 활동할 나이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지인들에 따르면, 과도한 흡연이 암의 원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고3 때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주도해 정학처분을 받았다. 그럼에도 서울 법대에 응시해 서울대 전체 수석을 차지할 정도로 수재였다. 법대 재학 중에도 학생운동에 적극적이었다. 삼성재벌 사카린 밀수사건이 터지자 같은 법대생 장기표 등과 규탄집회를 열고, 박정희 정권의 삼선개헌 반대 투쟁을 벌였다.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1971년)으로 1년 6개월 투옥됐으며, 민청학련사건(1974년)으로 수배되어 6년간 도피 생활을 했다. 이 시기에 '전태일 평전'을 썼다. 대학 졸업 후인 1971년 사법시험에 합격했지만, 12년이 지난 1983년에서야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이 바람에 그의 변호사 활동 기간은 7년 남짓에 그치고 만다.

(고 조영래 변호사/ 사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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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변호사 개업이 늦어진 것일까.

조영래는 법대 재학 중에는 사법시험보다 학생운동에 치중했다. 1969년 졸업 후, 대학원에 진학한 그는 절간에 들어가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1971년 제13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사법연수원에 들어갔다. 사법연수원을 마치면 바로 변호사로 활동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시국사건이 터졌다. 연수 기간인 1971년 '서울대생내란음모사건'으로 장기표 심재권 이신범 등과 함께 구속됐다. 조영래는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73년 출소하였으나 이듬해 1974년에는 민청학련사건에 연루돼 수배됐다. 도피 생활을 하던 중 장기표의 부탁을 받아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과 장기표로부터 관련 자료와 증언, 추가 취재 등을 통해 '전태일 평전'을 완성했다. 1980년 '서울의봄'이 오자 그에 대한 수배가 해제됐다. 그러나 사법연수원에 다시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서울대생내란음모사건의 굴레 때문이었다.

조영래, 사법연수원 복교에 경기고 선배 이종찬에게 큰 도움받아

조영래는 막막한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1980년 전두환 신군부의 '숨은 실세'였던 경기고 선배인 당시 중앙정보부 간부로 근무 중인 이종찬을 찾아갔다. 이종찬의 회고록에 따르면, "민정당 창당 작업을 하느라 중앙정보부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던 1980년 8월 어느 날(나의 수첩에 기록된 일자), 조영래 군이 나를 찾아왔다"고 했다. 조영래는 이종찬에게 "선배님, 저는 경기 61회 후배로 선배님 도움을 받고자 왔습니다"라며 "71년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사법연수원 재학 중에 구속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법연수원을 마치지 못했습니다. 이제 세상도 바뀌었고, 저도 새롭게 출발하고 싶습니다”라고 터놓고 도움을 청했다.

이종찬은 조영래에게 "자네를 오늘 처음 만나지만 이야기는 많이 들었네. 내가 돕는다면 어떤 방법이 있겠는가?"라고 물었고, 조영래는 "선배님이 법원행정처장에게 얘기해서 저를 다시 복교만 시켜주시면 되겠습니다"라고 했다. 여기서 복교 대상은 사법연수원을 말한다.

이종찬은 조영래를 구제하기 위해 서일교 법원행정처장을 찾아가서 협조를 부탁했다. 서 처장이 중앙정보부에서 취급한 사건이라 중앙정보부의 의견서가 필요하다고 하자, 현홍주 중앙정보부 정보정책국장에게 이 사안을 검토하도록 했다. 그리고 동년 8월 21일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합수부)의 협조도 받아냈다. 그리고 1주일 후 현 국장이 중앙정보부 의견으로 '가(可)하다'는 통보를 법원행정처에 보냈다. 이종찬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조영래는 사법연수원에 복교할 수 있었다. 1981년에는 대학원을 졸업, 법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조영래는 1982년 사법연수원(12기)을 마치고, 그해 9월 김앤장 소속으로 변호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83년 6월 남대문합동법률사무소를 개업하고 부설로 시민공익법률사무소를 개설했다. 1986년 인권변호사들의 상설조직인 정법회를 창립하였으며, 1988년에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발족을 주도했다.

여기서 문득 이런 의문이 든다. 이종찬은 조영래가 경기고 후배가 아니었다면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을까? 조영래는 이종찬이 고교 선배가 아니었다면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려고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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