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22일. 계묘년 설날, 고향을 다녀왔다.
아침에 삼촌, 사촌, 사촌조카들과 동생집에서 차례를 지냈다. 코로나19 전염병 팬데믹 이후 몇년만에 대가족이 모였다. 아쉽게도 내 가족은 나 혼자였다. 아내와 딸이 얼마 전 코로나에 걸려 격리는 해제됐으나 후유증이 우려돼 집에 남았다. 아들은 같이 가기로 했으나 출발 당일 감기 기운이 있다고 출발을 포기했다. 나 혼자 야간 고속버스를 타고 어머니가 계신 고향을 찿았다. 20일 새벽 1시가 지난 시각 고속버스에서 내려 택시를 탔다. 택시비가 2만 8천원 정도 나와서 기사에게 3만원을 지불했다.
까치설날이라는 21일에는 면 소재지로 나가 제사 떡을 찾아왔다. 이어 남동생과 같이 새우 튀김과 꼬치 전, 생선 전을 부쳤다. 제수 씨는 나물과 설거지를 했다. 저녁에는 평소보다 많이 늦은 시각에 가마솥에 차례용으로 쓸 생선(돔, 조기 등)을 쪘다. 약간 걱정스러웠던 것은 동생이 냉동고에서 미리 꺼내놓지 않아서 찔 때까지 큰 생선이 꽁꽁 얼어 있는 상태였다. 냉동 상태의 생선은 속까지 익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동생은 솥두껑에서 김이 난 시간부터 약 40분 동안 불을 때면 된다고 했다. 나는 약 45~50분간 불을 땠다. 설날에 먹어본 결과 잘 찐 것 같아 다행이었다. 산적은 남동생이 유튜브를 찾아가며 준비했다. 동생은 산적에 양파와 마늘을 넣었는데, 어머니가 양파와 마늘은 산적에 넣지않는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배를 갈아넣고 물엿과 간장으로 간을 한다고 하셨다. 이미 넣어버린 상황이라 그냥 조리기로 했다. 문어는 동생이 삶았는데, 부드럽게 잘 삶긴 것 같았다.
22일 이른 아침, 떡국을 먹고 한살을 먹었다.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갔다. 산소 옆 소나무들이 엄청나게 자라 10m가 넘는 것 같았다. 저 나무들은 키만 커는 것 같다. 아마 몇십년 지나면 제 키에 못이겨 넘어지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만물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때문이다.
점심을 먹고 삼촌, 조카들을 보내고 잠시 쉬었다가 귀경 준비를 했다. 어머니가 떡국거리를 챙겨가라고 하셨다. 가방에 들어갈 자리가 없어서 제사용으로 만든 시루떡 2조각만 넣었다. 읍내로 가는 버스가 2시 지나서 마을을 지나간다.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큰집(재종 형님댁)을 들렀다가 동네 앞 정류장으로 갔다. 버스가 다니는 산길 도로 쪽을 살펴봤다. 버스가 보이지 않았다. 정류장 칸막이 안으로 들어가서 핸드폰을 열고 지인들의 새해 인사에 답장을 해줬다. 그때 자갈밭 위를 지나가는 듯한 차량 지나가는 소리가 났다. 일반 승용차가 지나가나 생각했다. 정류장 밖으로 나와서 보니 마을버스의 뒷꽁무니가 보였다. 막 지나가버린 것이다.
다음차는 3시간 이후 저녁무렵에 온다. 하루에 3번, 오전, 낮, 오후에만 다니기 때문이다. 어릴 때는 시외버스가 하루 3번 다녔다, 지금은 군청에서 운행하는 미니버스가 3번 다닌다.
할 수 없이 면 소재지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약 6.5km 거리이므로 1시간 10분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면 소재지에 가면 30분 안팎 단위로 읍내 가는 버스가 있기 때문에 귀경하는 고속버스를 탈 수 있을 것 같았다. 설 연휴에는 표가 모자라 예매를 해놨기 때문에, 시간에 거의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6.5km를 걷기 시작했다. 산 아래 개울과 맞은 편 산 사이로 길게 펼쳐진 들판을 바라보며 걸었다.
추억의 초등학교가 보였다. 일부러 학교 근처로 가보았다. 사람이 기거하지 않는 듯했다. 한두 해 전만해도 누군가가 그곳에서 '체험교실'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떠난 것 같았다. 마른 잡초가 무성하고 인적을 느낄 수가 없었다. 학교 옆 작은 개울은 제방공사가 되어있었다. 예전에 울타리로 쳐져있는 탱자나무는 한그루도 보이지 않았다. 운동장 주변에 플라타너스 나무도 제법 있었는데, 몇그루밖에 남지 않은 듯했다. 플라타너스는 늦가을에 교감 선생님 지도로 큰 이파리의 낙엽을 줍는 청소를 했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를 지나자 핸드폰이 울렸다. 남동생이었다. "혹시 걸어가느냐?"고 했다. "어~"라고 했더니 "차 놓쳤냐?"고 했다. "어떻게 알았느냐?"고 했더니, 제수 씨가 알려줬다고 했다. 제수 씨가 청소하면서 우연히 창밖으로 내다봤는데, 내가 마을 앞 큰 길을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본 모양이었다. 나는 동생에게 부담을 안 주기 위해 면 소재지까지 걸어갈 참이었는데, 동생은 "거기가 어디냐"면서 "기다리라"고 했다. 동생은 술을 마셔서 대신 제수 씨를 보내겠다고 했다. 괜찮다고 해도 차를 보내겠다고 했다. "그래, 알았다"고 대답해놓서도 나는 계속 걸었다.
초등학교를 중심으로 마을이 동서남북으로 산재해 있는데, 남쪽 마을을 관통했다. 설날인데 마을 사람들이 한명도 안 보였다. 겨울이어서 대부분 집에서 쉬겠지만, 동네에 청년들과 어린 아이들이 거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아랫마을을 지나 산자락으로 길게 이어진 개울 길을 걸었다. 개울에는 맑은 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산자락을 돌아서 20분 거리에 있는 마을에서 이곳을 지나 초등학교에 다니던 친구들과 선후배들은 여름에 이곳에서 멱을 감기도 했던 웅덩이도 보였다.
빠른 걸음으로 걷는데도 손발이 약간 시려왔다. 6.5km를 걷는 것이 무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수 씨가 올 때가 된 것 같아 들판 옆으로 난 도로 변을 살펴봤다. 차량 몇대가 좌우로 지나갔다. 얼마 후, 동생 차로 보이는 차가 산 모퉁이에 섰다. 내 앞에서 약 150m 정도 남은 거리였다. 제수 씨가 조카들을 데리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온 김에 조카들과 마트에 간다고 했다. 나를 면사무소 소재지에 있는 시외버스터미널까지 데려다주었다.
예상치 않게 버스를 놓쳐 어린 시절 추억의 길을 걷다가, 동생 차를 타면서 그 추억은 끝이 났다. 면 소재지 터미널에서 약 20분 후 읍내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읍내 고속버스터미널에서는 약 1시간 이상 고속버스 시간이 남아있었다. 가방을 메고 밖으로 나와 근처 커피점을 찾아보았다. 주변에 두세 개 커피점을 찾아 갔지만, 허탕이었다. 설날이라 문을 열지 않았다. 하는 수없이 터미널로 돌아와 휴게실에서 대기했다.
예매한 차 시간표보다 15분쯤 이른 시간에 "서울 가실 손님 계세요?"하고 누군가가 외쳤다. 고속버스 운전기사였다. 'QR' 인식으로 버스표를 확인하고 지정된 좌석에 앉았다. 서울 터미널까지 평소 시간보다 약 40분 정도 늦게 도착했다. 설 연휴에 이 정도 시간 지체면 아주 양호한 편이었다.
귀경하면서 핸드폰으로 SNS를 보니 설 얘기가 많다. 그 중에 만원버스의 안내양 사진이 있어 추억이 되살아났다. 특히, 설이나 추석에는 하루 3번 다니는 버스를 타기 위해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지금은 군에서 지원하는 미니버스가 다니지만, 옛날에는 대형 시외버스가 다녔다. 자가용도 없던 시절이었다. 명절 연휴에 고향을 찾았다가 도시로 돌아가는 날에는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안내양은 버스 요금을 받고 거스름돈을 내주는 일을 했다. 문이 닫히지 않은 상태에서 안내양이 "오라이~"하면 차가 출발했다. 버스 운전기사는 안내양이 출발 신호를 보내야 출발했다.
언제 쯤인지 기억할 수는 없지만 '안내양 없는 버스가 다닐 것'이라는 뉴스가 나왔다. 그때는 안내양 없다면 요금은 누가 받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안내양이 없다. 요금도 자동으로 계산한다. 기술의 발달은 사람들의 생활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아래 사진은 어느 페친(페이스북 친구)이 올린 안내양 사진이어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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